- Documents Category / 도큐먼트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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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濕地)를 그린다는 것
김남시… 수많은 넝쿨과 가지, 뿌리들이 뒤엉켜 있는 덤불, 마찬가지로 무수한 물풀과 꽃, 물웅덩이들이 얽혀있는 습지는 그 자체가 ‘바로 이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나 선인장이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는 단수 명사라면 곶자왈 덤불이나 뉴질랜드의 습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그것이라고 헤아리거나 지칭하기 어려운 군집 명사다. 이 거대하고 무정형적인 덩어리, 개체적으로 다른 것들과 독립되어 있지 않기에 차라리 ‘장소’라 불러야 마땅할 것을 그리려면, 선인장이나 사람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선택과 구획의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 -
이미지의 연금술
김정락… 단견에 이광호의 작품은 주름 없는 미학이 대중화된 현 사회에 적절한 회화형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가 매끈한 이미지에 치중한다는 견해는 전술한 반론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의 회화술의 정점은 양감의 최소화와 질감의 극대화이다. 여기서 말하는 질감은 앞에서 다루었던 표면의 촉각적 속성이며, 작가는 표면 질감은 물론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대기의 온도까지 추체험하게 해준다. 이 속성을 재현해 내는 것에 집중한 회화는 그 표면 위에서 주름의 세계관을 야기한다. 이 맥락에서 비로소 촉각적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이 자유로운 회화행위로 인식된다. … -
… 사진을 보고 사실적으로 세세하게 그린 선인장 표면에 액션을 가미하여 자유롭게 긁어낸 흔적은 작가의 손길을 보여주며 개성과 욕망을 드러냈다. 유화는 더디 마르니까 마르기 전에 판화 도구인 니들로 긁어내서 자취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광호는 고무 붓이나 니들로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벗겨낼 때’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미 그려놓은 그림의 표면을 고무 붓으로 뭉개거나 니들로 긁어내는 일은, 붓으로 어떤 형태를 그려 만들어내는 것과는 정반대인 ‘탈’ 만들어내는 행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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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적 향유
김남시 / 《그림 풍경》(2014, 국제갤러리) 도록… 초기작 〈나의 그림〉(1996), 〈동물원〉(1996), 〈야유회〉(1996), 〈세 사람〉(1996), 〈MK의 점심식사〉(1995)에서 이광호 작가의 시선은 한 인물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인물의 시선은 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는 늘 거기에 없었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선의 응답을 갈구하는 장치들을 그려 넣지만, 결국 이 작품들은 응답받는 데 실패한 시선의 흔적들이다. 시선에 응답하지 않는 세상은, 그래서 이 그림들에서 낯설고 차갑게 그려져 있다. 응답받지 못한 시선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 마련이다. 일방적인 시선만 던지고 있는 자기 자신이 고통스럽게 의식되기 때문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처럼, 응답받는 시선이 아우라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면, 응답받지 못한 시선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낳는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욕망이 오늘날의 화가 이광호를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 -
촉지적 풍경
이은주 / 《그림 풍경》(2014, 국제갤러리) 도록… 이광호가 《회화술》(1998, 덕원갤러리)이라는 전시에서부터 ‘인터뷰(Inter-View)’의 인물화 연작, ‘선인장’의 정물화 연작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문제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온 작가라는 맥락에서 볼 때, 풍경화로 이동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자연 풍경은 현실 속 장면인 동시에 도시 공간과는 다른 미지의 신비로움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현실과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는 그림의 지위와 매우 유사하다. ‘풍경’이라는 개념에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위치가 적극적으로 개입된다. 부감법과 같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관념적 시선을 제외한다면, 인간의 신체 범위 보다 큰 현실의 풍경을 경험적으로 그릴 때 관자의 시선은 언제나 그 풍경 안에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의 위치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대상화할 수 있는 정물에 비해 보다 깊은 주관성을 풍경에 개입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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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광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것”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아나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눈 맞추기였다. 2005년 이전까지 그의 작품은 그림으로 그려진 사적인 독백이자, 세상과의 눈 맞추기 과정이다. 친구, 아내 등 그의 지인들이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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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 표면으로서의 회화
박영택… 그는 선인장을 크게 확대해서 그렸고 또한 자연풍경을 일정한 거리에서 관조해 그렸다. 둘 다 어떤 거리감 속에서 무심하게 그려졌다. 대상의 중심으로 육박해 들어간 이 선인장과 풍경은 비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둘 다 식물성의 존재들이고 자연이다. 인물의 피부, 의복의 표면 질감 등을 집요하게 포착해 나가던 시선과 손들이 이후 자연스레 선인장의 피부로 이동했다. 모든 사물의 외피, 그 표면의 촉감을 시각화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다가 선인장이란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 -
선인장 — 시선의 생산
유진상회화는 이른바 추상예술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실루엣과 자세를 다시 창조하면서 풍경–얼굴의 조직화 속에서 이미 충분히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 -
시선과 반응
윤진섭… 이광호의 인물화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묘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가능한 한 대상이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다. 그는 피부와 옷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드러나도록 거기에 맞는 필치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유화의 필법에 관한 다년간의 수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 -
개인적인 토로(吐露)에 다름없는 사연들이 이미지와 불가분의 짝을 이루는 이광호의 그림은 그것의 필연적인 서술성과 이미지 자체의 호소력 사이에서 유영한다. 그가 사용하는 시각언어는 기본적인 조형요소들이 전하는 극히 시각적인 환기력과 함께, 분명 알레고리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의 문화적 관습과 일상의 경험 내에서라면 충분히 그 의미가 짐작될 법한 범상한 상징성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광호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가 구사해 낸 조형의 면면을 감상함과 동시에 그가 애써 담아 놓은 이야기를 부담 없이 '읽는' 일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