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본 건 단 한번 창동 스튜디오에서였다. 모델을 앞에 두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그는 인물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한 10여 분쯤. 그렇게 그는 초상화를 위한 기초 작업을 끝냈다. 그는 초상 의뢰를 받는 초상작가는 아니었다. 시인 고은 선생이 『만인보』(1986)라는 시를 지었던 것처럼,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여럿 그려내기로 작심한 듯 많은 초상화를 그렸고, 그것으로 전시도 하였다. 그는 벌써 중견에 가까운 나이의 작가다. 하지만 그의 태도—간혹 선배인 나를 대할 때의 장난기 섞인 모습을 상기하면—는 아직도 어리고 순수하다. 그 순수함에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진솔함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작업에서도 그렇다. 그는 작업을 업으로 삼았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길 원한다. 그런 그를 만나는 일은 부담이 없다. 에둘러 말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최단거리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그이기에 가부는 빨리 분명해진다. 이제 잡설을 그치고, 그의 작업에 대해 짧게 서술하겠다.
사실 - 허구 - 관념
우선 나는 '사실주의'라는 개념이 이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토로하고 싶다. 구상이건 추상이건 간에, 미술은 사실에서 투사된 일종의 그림자(혹은 이미지)이다. 조형매체에 이미지가 전사되면서 그리고 개별적인 작가의 의도 속에서 이 투영된 현실이 조작되고 재구성되면서, 현실의 사실은 미술 내적 사실로 변화된다. 이 전이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순수한 허구(fiction)를 보게 된다. 즉 미술은 사실을 허구로 이끈다. 그러나 이 허구로부터 예술은 보는 사람들에게 유추할 여러 가지 내용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오래된 이론이기도 하다. 이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회화론』(Trattato della pittura, ?)에서 주목되는 것은 회화가 지닌 유추 기능이다. 그에 따르면, 회화는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달리 보다 섬세하고 복잡한 사유의 경로를 거쳐서 감상을 완결 짓게 된다. 이러한 인문학적 접근방식으로 다 빈치는 회화의 우위성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그가 같은 책에서 언급한 거울과 같은 재연과는 모순적으로 대립한다. 사실성은 연상 작용과는 달리 경험론적이며, 오히려 감각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는 사실주의가 이러한 유추과정의 끝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선행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이광호의 사실주의적 표현성은 인식적 사실에 대한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사실주의는—그것이 사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사유와 예시 혹은 증후의 형상화로서 작용한다. 이것은 다 빈치의 유추의 연장선 위에서 생각해 볼만 하다. 쉽게 풀이하자면, 그의 극사실적 표현은 그 자체를 위한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사실적인 재현 속에서 다른 의도를 표출한다. 그것은 순수한 관념적 이데아에 가깝다. 그러나 겁먹지 마시라. 이 철학적 개념이 마치 형이상학적 차원의 담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이광호의 그림은 우선 사실성으로 다가온다. 때론 그 사실성이 교묘하게 조작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간혹 이광호가 그린 인물과 사물이 사진과 가깝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직접 대상을 기계적으로 옮겨놓지 않는다. 그가 투사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사유를 언어로 다듬어 그것을 형상화에 이입시켜 놓는다. 이쯤에서 사실성은 상징과 알레고리로 변신하게 된다. 일종의 '변신(Metamorphosis)'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변신한 형상은 일종의 예기적 빈사법 혹은 예시(Prolepsis)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형상의 언어치환 가능성에 관하여
형상=언어의 연관은 미술이 지닌 언술 기능을 발견한 고대부터 줄기차게 미술사 속에서 그 맥을 이어왔다. 고전 미술사학자들은, 예를 들면 바르부르크(A. Warburg)에서 파노프스키(E. Panofsky)에 이르기까지 그런 언술 기능의 체계를 밝혀냄으로써, 그림 혹은 형상구조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불러낼 수 있는 학술적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도상해석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미술사학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해석학적 미술해석의 선구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도상해석학은 현대미술에도 간혹 적용되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방법론은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해석에 가장 잘 적용된다. 특히 중세 말기 혹은 르네상스 초기 회화들에 관해 도상해석학의 탁월한 분석력은 아직도 감탄할 만하다. 예를 들어, 프라 안젤리코의 제단화를 단순히 미학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작품의 일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안젤리코의 그림은 순수 미학적으로도 우수하다. 하지만 배경을 만드는 건축물의 세심한 형상들이나, 성모가 입고 있는 옷의 색깔들 그리고 집안에 놓여있는 작은 소품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의미를 담고 있는 형상언어들이다. 그래서 이 사물들이 도상해석학으로 해석되고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될 때에 비로소 그림은 열려진 책으로 감상자에게 읽혀진다.
이광호의 그림도, 안젤리코의 기독교적 도상구조는 아니지만, 말이 되는 형상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의도는 충분히 도상학적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 말로 전환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젤리코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신비주의 대신에 그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전기(傳記)적 신비주의를 더 나아가 작가 개인의 사적인 생활에서 건져낸 암시나 증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하겠다. 가령 〈태몽〉(2003)이나 〈머리 깎기〉(2001)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예견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미장원의 벽에 걸려있던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의 배경과 설정은 그대로 자신의 일상사를 위한 무대처럼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 비교(秘敎)성이 짙은 이 도상구조는 이제 작가의 가족이 염원하는 행복을 위한 일상적 기원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경험적 삶의 서술구조를 기독교의 전례적인 도상학적 형상에 의존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에 대한 해독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점이 이광호가 주는 친절함이다. 즉, 그림의 구조는 현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읽혀지는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도 가능한 일상사이다. 일상사가 신비주의를 갖는 데에는 상징화된 형상들에게만 있지 않다.
일상에서 건져낸 상징성 혹은 도상학적 요소들
이광호가 그림 속에 인용하는(혹은 차용하는) 상징물들은 각 개인의 존재들과 이 존재들이 엮어낸 사회적 사건들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쪽보다는 사건이 남긴 흔적을 상징화하여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그러므로 이광호의 도상학적 요소들은 전통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작가의 자의성으로 발견하고 그림 위에 가져온 것이며, 비로소 그림이라는 맥락 혹은 구조 위에서만 그것들의 언사를 구성해 낸다. 2007년 국제갤러리 전시에서 그는 초상화와 더불어 그 인물들이 지닌 개인적인 소지품들을 인물에 대한 지물(指物)로서 따로 전시하였다. 티셔츠, 시계, 열쇠, 십자가를 단 묵주 등등 한 개인이 지녔던 개별적인 역사를 대변하는 물건들이 벽면에 박물처럼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작가는 더 나아가 인물에 대한 인상 혹은 인물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전달할 촉매제로서 상징적인 사물을 함께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언술적인 의미로서 혹은 문맥의 종속관계로서의 연관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인물을 대리?상징하기 위한 사물을 초상화에 못지않게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 사물은 기호학적 연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작가 자신의)감성의 표상으로서 초상화와 등가를 이룬다. 사물들은 작가가 인물을 그려내는 동안에 경험하고 연상한 것들이어서, 사실상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의 의지나 요구와는 별도의 문제다. 그리고 작가는 스스로 지정한 이 새 대상에 원 인물들에게 향했던 욕망을 투사한다. 그리고 이 투사하는 과정(즉, 작업) 속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욕망을 배설한다(혹은 -했다). 수없이 많은 세세한 붓질에서 작가가 마치 대상을 스킨십하고 있었음을 느끼는 것은 과장이 아닐 성싶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은 그림으로 남은 대상의 이미지를 바라보았던 바로 그 시선이다.
Inter-View
작가 이광호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식적인 것에서부터 권력적인 시각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보는 것 혹은 보이는 것, 시각관계는 미술뿐만 아니라 사회 내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관계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시적 성격을 지닌 모든 관계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만남 혹은 인연이 되어 무리를 이루고 그 무리가 사회가 된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시각은 언제나 이러한 이끌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은 욕망을 지시(indicate)하는 대리적 현상이다. 상상해 보라. 아름다운 여성에게 뭇 남성들의 시선은 가히 폭력적인 수준에 다다른다. 이것은 칸트(Kant)식의 순수 미학적 응시가 아니라 라캉 식으로 표현해 욕망 표출이다. 이광호의 시선은 욕망을 드러내는 시선으로 구성되며, 혹은 그 욕망이 엮어내는 일종의 드라마로서 시선의 교차와 중첩 혹은 교환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그림 내외의 시선관계는 작은 시놉시스를 구성하게 되며, 이것을 가지고 그림은 한 사건을 구체화하거나 일상의 다반사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광호는 시선의 관계 속에서도 도상학적 해석구조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이지 않다. 그림은 내적 그리고 외적 시선구조를 감안해서 구성되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이 감상자에게로 보내는 시선은 이미 르네상스부터 알려진 지시적 시선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지시형상(Identification figure)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의도했던 수많은 개별적인 인물화들은 그러한 상호작용적(interactive)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한때 작가를 같은 표정과 태도로 쳐다보고 있었겠고, 아마도 그 시선은 작가의 시선에 대한 응답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단지 개별자들이 그림 밖으로 향한 시선 속에서 작가의 욕망을 반사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제 나의 도상학적 해석은 시선과 상징으로 추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작가가 외부로부터 수용한 자극이자, 또다시 외부로 향한 욕망을 이야기화한 매개물이 된다. 이런 매개물들의 사실적 재현 혹은 구성이야말로 이광호의 작업을 독특하게 보게끔 만든다. 정리하자면, 그의 회화는, 약간은 현학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메타-사실주의(Meta-Realism)'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김정락(미술사)
관련 전시 : 《Lee Kwang-Ho》(2008, 대구MBC 갤러리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