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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세상에 출현한 이후 그림과 영화의 연관성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되어 왔다. 시각적인 감상방법에 의존한다는 동일성은 쉽게 그림과 영화를 연관시키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쪽의 연관성은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시각적인 영감의 연결이 중요하지만 더 복잡한 것은 그림이 갖는 주관성과 추상성이 영화라는 상대적으로 해설적인 매체로 전환될 때 만들어지는 상상의 공간이다. 때문에 많은 영화 감독들은 그림에서 소재를 찾거나 영감을 얻어내기도 한다. 그 상상의 공간에서는 영화매체의 특성상 잃어버리기 쉬운 무한한 추상성이 자유롭게 작용해서 새로운 이미지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만들기의 출발은 이런 상상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들은 영화 작업에 앞서 자신이 만들 영화의 상상의 공간을 그림이나 사진 혹은 음악 등과 같은, 영화보다는 압축적인 이미지로 결정하고 작업이 끝날 때까지 그 공간을 유지하려 한다. 한 영화가 감독의 머리 속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지기까지 짧으면 1년 길면 3, 4년이 걸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런 추상적인 이미지들은 긴 작업기간 동안 영화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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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광호를 만난 것은 친
구를 따라 우연히 간 그의 전시회에서였다. 당시 나는 '접속'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 전시회에서 내 영화를 만들어줄 상상의 공간을 발견했다. 도시라는 공간과 그 속의 외로움,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 사랑이라는 감정의 엇갈림, 그런 이미지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의 그림은 내 영화의 상상의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고 짧은 시간 동안 혼돈스러웠던 이미지들이 쉽게 자기 자리를 찾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시가 끝나고 그의 작업실을 찾았고 그는 내 영화를 위한 이미지 그림을 그려주었다. 신선한 발견이었고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시선들의 엇갈림, 그림을 본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의 교감, 숨겨진 이야기들의 교차.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많은 이미지들이 머리 속에서 정리되면서 영화 ‘접속'은 구체성을 갖기 시작했었다. 관객은 알 수 없었겠지만 그의 그림이 영화 곳곳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출발과 완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고 싶은 나의 숨겨진 의도였다. (작업을 도와준 그에게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의미있는 보답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다.) 이런 작업은 '텔미썸딩'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소외된 도시의 외진 공간과 속도, 심각한 범죄, 실체를 감춘 불분명한 이미지들, 불빛들의 강요된 낭만, 깊은 미궁에 잠겨버린 슬픔. 단 한 폭의 그림에서 발견한 그런 이미지들이 영화를 일관되게 만들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이 그림은 영화의 티저 포스터로도 사용되었고 당시 영화와 극장 관계자들에게 재미난 이야기꺼리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배우들이 배제된 영화 포스터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고 제목까지 영어이다 보니 외국영화로 오해하기에 충분했었다. 물론 그런 포스터의 모호함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이기도했다.) 다음 작품에서도 그와의 작업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SF 장르의 영화여서 자신의상상력이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얘길 이미 들었지만 미련이 남는다.) 그의 그림과 상상력이 내 영화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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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그림에서 영화의 다양
한 이미지들을 찾아왔던 나에게 이번 그림들은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했다. 물론 '이중간첩'이라는 특정한 영화로부터 출발한 작업이겠지만 영화라는 큰 틀이 담겨져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는 구체적인 스토리와 현실적인 배우의 연기, 압축적인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관객들에게 의미전달되지만, 이미지를 통한 대화이기에 중첩적인 많은 느낌과 의도들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가시광선에 비유한다면 그 광선의 실체는 여러가지 색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합체인 것이다. 그동안 그의 영화와 연관된 작업이 감독의 프리즘을 통해서 다른 색의 광선들로 분산하는 스펙트럼 과정이었다면, 이번 작업은 영화라는 광선을 그 자신이 프리즘이 되어 그림이라는 다른 색의 결과물들로 분해한 듯 보였다. 희미한 밤풍경과 후래쉬가비쳐진 듯한 긴장감이 숨은 그림과 도시의 속도와 흔들림 속에서 신념조차 흐릿해지는 등장인물의 시선을 표현한 그림들은 분명 영화의 내적 요소를 분해한 그림인듯했다. 하지만 단순하리라 여겨지는 영화의 한 요소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고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을 상징한 듯 보이는 꽃은 수많은이야기로 쌓여있다. 가려진 부분으로 인해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은 영화 속의 불안한 현실을 강조하고 있고, 낭만적인 푸른광장옆에 노출이 지나쳐 형체를 잃어버린 얼굴에는 현실에 잠식된 숨겨진 슬픈 이념의 낭만이 표현되어 있다. 분명 그 하나하나의 그림들은 화가의 위치에서 깊어지고 풍부해지고 있었고, 이중간첩이라는 한편의 영화에 모아졌다기보다는 영화라는 보편적인 결과물로 확대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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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전의 작업과는 다른 새
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사적인 이야기나 주관성은 영화라고 하는 보편화된 현실로 확대되었고 그것을 표현하고 대화하기에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감독인 나의 시각에서 그의 그림은 영화보기에 또 다른 시선을 제시해 주었고 영화가 세상 읽기의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계기가되었다. 내게 영화만들기의 의미가 그의 그림 그리기와 동일하진 않겠지만 그의 그림 속 영화는 분명 나의 영화 만들기에 새로운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장윤현 (영화감독, 씨앤필름 대표)
관련 전시 : 《이중간첩》(2002, 인데코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