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濕地)를 그린다는 것

김남시
October 31, 2021
구상 회화는 세계로부터 구획해 낸 한 부분이다. 화가는 자신이 보는 세계의 한 부분을 선택하고 잘라내어 캔버스 프레임 안으로 가지고 온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그를 어떻게 구획해 내었는지에 따라 그림은 크게 달라진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려진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으로 구분하지만 회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건 그를 어떻게 구획하여 캔버스에 옮겨 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려진 대상의 종류만으로 따진다면 이제까지 이광호 작가의 작업은 초기의 초상화에서, 선인장으로 대별되는 정물화, 지금의 풍경화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구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이 작가가 처음에는 사람, 그 후에는 선인장을 그리다가, 지금은 곶자왈 덤불이나 뉴질랜드 습지를 그린다는 밋밋한 사실뿐이다. 하지만 질문을 다르게 던져보면 우리는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광호 작가의 그림은 세계를 어떻게 구획하여 캔버스로 가지고 오는가.
 
사람이나 선인장은 그 자체로 주위의 다른 것들과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개체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고, 특정한 형태와 색깔의 선인장 한 그루는 ‘바로 이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칭될 수 있다. 물론 사람이나 선인장도 늘 특정한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이들을 그 장소에서 추출해 내는 구획(cut-out)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범주에 따라 분류되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사람이나 선인장을 선택해 캔버스로 옮겨 놓는 건, 슈퍼마켓 진열대에 상품별로 분류되어 있는 물건 하나를 집어 쇼핑 카트에 집어넣는 것과도 유사하다. 덤불과 습지 그림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수많은 넝쿨과 가지, 뿌리들이 뒤엉켜 있는 덤불, 마찬가지로 무수한 물풀과 꽃, 물웅덩이들이 얽혀있는 습지는 그 자체가 ‘바로 이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나 선인장이 하나하나 헤아릴 수 있는 단수 명사라면 곶자왈 덤불이나 뉴질랜드의 습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그것이라고 헤아리거나 지칭하기 어려운 군집 명사다. 이 거대하고 무정형적인 덩어리, 개체적으로 다른 것들과 독립되어 있지 않기에 차라리 ‘장소’라 불러야 마땅할 것을 그리려면, 선인장이나 사람을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선택과 구획의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그 과정은 몇 단계로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작가는 덤불이 있는 제주도 곶자왈, 습지가 있는 뉴질랜드 국립공원으로 직접 이동해야 한다. 작가가 있는 곳으로 데려올 수 있던 사람이나 선인장과는 달리, 덤불이나 습지는 작가가 직접 그곳에 가야만 접할 수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그려지는 사람에게 발휘되던 작가의 권력은 상실되고 그려지는 대상과 작가 사이의 관계도 전도된다. 사람이나 선인장은 자기 앞에 가져올 수 있던 작가이지만, 덤불이나 습지에는 자기 자신을 그리로 가져가야 한다. 그렇게 도달한 덤불이나 습지 안에서 본격적인 구획 작업이 시작된다. 작가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림으로 그릴 만한 방향을 선택한다. 한 그루의 가시나무, 삐쭉 솟아있는 한 포기의 풀이나 꽃처럼 한두 개의 개체를 구획해 내려는 것이 아니기에 작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저기’ 혹은 ‘저쪽’이라고 밖에는 달리 지칭되기 힘든 덤불이나 습지의 한 영역이다. 그렇게 선택된 영역은 작가의 카메라 프레임으로 구획되어 촬영된다. 이 과정에 수십 아니 수백 장의 사진이 찍힌다. (작가는 디지털 사진 파일에 자동생성된 번호를 작품 제목으로 삼는데 ‘Untitled 2232’ 같은 제목이 있는 걸 보면 그의 카메라가 찍은 사진은 수천 장이 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1단계다. 다음 단계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진행된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작업실 컴퓨터에서 다시 선별의 과정을 거친다. 작가의 눈은, 내가 보기에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는 수십, 수백 장의 덤불이나 습지 사진 중 몇 장을 골라낸다. 구체적으로 ‘이것’이라 지칭할 만한 대상이 없는 사진들이니 이때의 선택 기준은 아마 이미지의 색감이나 분위기 등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진이 선택되었다면 이제 두 번째 구획이 시작된다.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1차로 구획되어 생겨난 덤불이나 습지의 사진 이미지에서 작가는 또다시 어떤 한 부분을 크롭(crop) 해 낸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그 부분을 잘라내어 그리는 것일까. 작가에게 물어보아도 흡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한다. 이 최종 구획 작업의 담당자는 작가 자신도 설명하기 힘든 방식으로 작동하는 작가의 눈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일상적 의미론의 층위에서 이미 구분되어 있는 사람이나 선인장을 그리는 것과 이런 여러 단계의 구획과 선택을 거쳐 덤불이나 습지를 그리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이 작가가 초상화와 선인장-정물화를 그리다 덤불과 습지-풍경화를 그리게 된 것을 단지 그림의 소재가 달라졌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광호 작가 화력(畵歷)에 일어난 중요한 전환이다. 이 전환이 갖는 함의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첫째, 당신이 누군가가 그린 그림에서 그 사람의 내면을 읽어내려는 분석가라면,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획되어 그려진 그림에 동일하게 접근할 수 없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려진 대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림에 대해 당신은, 왜 하필 이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을지, 수많은 사물들 중 왜 하필 선인장을 선택했을지, 그중에서도 이런 형태와 색깔의 선인장을 그린 이유가 무엇일지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는 선택된 대상에 대한 작가의 관계나 욕망, 그 대상의 상징적 함의 등을 근거로 그 그림의 무의식적 배후가 무엇일지를 추론할 것이다. 그런데 덤불이나 습지 그림은 이렇게 분석하기 힘들다. 이 그림에서는 작가가 행한 선택의 무의식적 배후를 유추할 시각적 단서들의 추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저 넓은 덤불에서 작가는 왜 하필이면 이쪽, 습지의 이 방향을 선택했는지, 또 그렇게 찍은 수백 장의 사진들 중 왜 이 사진을 골랐는지, 나아가 한 사진 이미지에서 왜 하필 이 부분을 크롭 해 캔버스에 옮겨 그렸는지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따져 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작가가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분명히 드러나는 초상화나 선인장 그림에서와는 달리, 이 그림들에서는 그 선택과 구획의 배후에 있을 (무의식적) 욕망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은폐된다. 
 
그려진 대상과 배경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초상화나 선인장 그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덤불이나 습지 그림의 올 오버(all-over) 형식도 이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마치 작가의 리비도가 향하는 대상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덩굴과 나뭇가지, 갖가지 풀과 꽃들로 덮어 캔버스 전체에 흩뿌려 놓은 것 같다. 이렇게 보면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이광호 작가의 덤불 그림에 가끔 등장했던 꿩이 예사롭지 않다. 화려한 빛깔의 깃털을 가진 수컷 꿩 한 마리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덤불 속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꿩은 ‘번식기에는 가장 힘세고 나이 든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지만’ ‘궁지에 몰리면 몸은 내놓고 머리만 풀 섶에 숨기는’ 묘한 습성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무와 풀, 넝쿨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덤불 한가운데 보일락 말락 그려놓은 한 마리의 수컷 꿩. 그는 초상화나 선인장 그림에서 덤불과 습지의 올 오버 페인팅으로 전환되는 이행기를 특징짓는 중요한 흔적이다. 이런 여러 함의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하던 꿩은 2018년 이후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궁지에 몰리면 몸은 내놓고 머리만 숨기던’ 꿩이 이제는 습지의 풀숲과 물웅덩이 속으로 더 깊이, 더 은밀하게 숨어들어 아예 보이지 않게 된 것일까? 아니면 다채롭고 화려한 꿩의 깃털 빛깔을 나눠 받은 습지 그림 자체가 저 수컷 꿩의 환유가 되어버린 것일까? 
 
둘째, 이 전환은 이광호 작가의 그림이 캔버스 외부의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의 변화를 함축한다. 초상화나 선인장 그림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되고 완결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면, 덤불과 습지의 올 오버 페인팅은 그보다 더 큰 세계에서 잘라낸 일부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캔버스 내에서 맥락적 완결성을 갖는 초상화나 선인장 그림이 그 바깥을 지시하지 않는 데 반해, 덤불이나 습지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눈앞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의 바깥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덤불 그림과 습지 그림에서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2014-15년의 덤불 그림과 비교해 보면 습지 그림은 확연하게 밝아지고 색도 다채로워졌다. 어지럽게 엉켜있는 나무 넝쿨들이 새벽이나 초저녁 어스름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는 덤불 그림이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주었다면, 습지는 청명한 하늘에 모든 걸 밝게 비추는 해가 떠 있는 대낮의 모습이다. 덤불이나 습지 그림 둘 다 더 넓고 큰 외부 세계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차이는 그림에 대한 인상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시선과 진입을 가로막으며 펼쳐져 있는 덤불이 이 그림 바깥에서도 더 크고 강고하게 계속될 것이라는 예감은 그림을 보는 우릴 갑갑하게 만든다. 덤불에서 느껴지던 고립감과 폐쇄감이 더 강화되는 것이다. 습지 그림에서는 반대다. 습지는 덤불에 비해 밝고 시선을 가로막는 것 없이 트여있는 넓고 광활한 평지다. 사방으로 밝게 트여있는 공간이 프레임 외부에서 더 넓게 펼쳐져 있는 걸 상상하는 감상자는 상쾌한 해방감을 얻는다.
 
이 차이는 덤불의 수직적 구조와 습지의 수평적 구조와도 관계가 깊다. 덤불 그림에서는 위를 향해 자라나 엉켜있는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이 우리의 이동과 시선을 가로막으며 서 있었다면, 습지는 사방이 활짝 트여있는 평지다. 이런 습지의 수평적 구조에는 정강이에 올 정도로 낮게 자란 다채로운 색깔의 풀들만 있을 뿐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는 것이 없다. 덤불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면, 말 그대로 ‘젖은 땅’(濕地)인 습지는 우리의 ‘아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발밑에 있는 것이다. 이런 습지 그림이 전시장 벽에 수직으로 걸려 디스플레이될 때 미묘한 현기증을 불러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나는 습지 그림에도 이광호 작가 그림 특유의 양가성이 등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양가성을 가장 분명히 보여준 건 선인장 그림이었다. 선인장은 ‘뭉글뭉글하면서 까칠한’ 표면을 만져보고 싶은 촉각적 욕구를 일깨우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가시로 그 욕구를 중단시키는 양가성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더 날 서게 만든다. 욕망은, 우릴 끌어들이는 유혹과 그에 대한 금지를 동시에 작동시킬 때 가장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습지 그림도 그렇다. 폐쇄적인 덤불과는 달리 사방으로 개방된 습지의 수평성은 그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를 불러낸다. 하지만 사방으로 트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딛자마자 우리의 몸을 끌어당길 물웅덩이로 인해 마음껏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다. 습지에는 우리가 그 위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 몸은 진득한 습지의 흙 속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작가의 습지 그림에는 물에 떠 있는 점 혹은 섬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땅(흙)들이 있고 그 위에 습지 특유의 얇고 긴 풀과 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점처럼, 섬처럼 흩어져 있어 발을 길게 뻗거나, 힘을 써 건너뛴다면 잠시 몸을 의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징검다리 같은 땅이다. 어떤 그림에는 군데군데 파편적으로 흩어진 땅보다 훨씬 넓은 물웅덩이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저 아래의 흙을 어스름한 무정형의 색깔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주변의 풀과 하늘의 푸른 빛을 비추고 있는 물웅덩이의 표면은 아름답게 빛난다. 하지만 거울처럼 매끄러운 그 표면은, 나르키소스를 유혹해 파멸에 빠뜨린 연못처럼, 우리 몸을 미끄덩 끌어들일 진창의 흙을 그 아래에 감추고 있다. 넓은 습지의 개방성을 향유하려면 청명한 하늘빛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는 물 위로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온갖 색깔의 풀이 자라고 있는 파편 같은 땅을, 나 혼자 겨우 올라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땅을 잘 골라 디뎌야 한다. 그 좁은 땅 위에 자란 얇은 풀들은 그림으로만 보아도 미끄럽다. 애써 그 섬 같은 땅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그 곁의 물웅덩이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습지는 밝고 아름답지만 그만큼 불안한 곳이기도 하다. 밝고 광활한 습지의 개방성과 수평성은 그 위를 움직이는 우리의 불안을 대가로 치르고서야 향유될 수 있다.
 
어둡고 갑갑한 덤불에서 빠져나온 작가가 도달한 곳이 이런 습지다.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습지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성공할지, 아니면 그 바로 곁에 있는 물웅덩이로 미끄러져 온 몸을 진창에 담그게 될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런 팽팽한 줄다리기가 그림에 생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남시(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이광호》(2021, 조현화랑 부산)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