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연금술

김정락
October 23, 2020
작가의 초기 작품들은 서사적인 내용을 사실과 비(非)사실이 혼재하는 중층적 구조로 연출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비평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작품 내에서 연출된 시선의 관계망들이 갖는 의미들에 주목하였다. 이 의미들은 여전히 그의 작품 속에서 적지 않게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이후 인물, 식물, 풍경으로 이어지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사물의 표면에 천착하여 그 결을 드러내는 것에 천착했다. 재현이란 관찰된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고, 이 반응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시선이란 ‘기하학적 방식(more geometrico)’처럼 자명할 수 있지만, 반응하는 자아의 내부에는 그리고 자아의 행위에는 수많은 변수와 우발적 전환이 개입되고 발생한다. 필자는 그 많은 변수 중에서 몇 가지만 주목하겠다.
 
1. Manner(=Manier)
모든 사실적인 결과물이 사실(현실)과 등가를 이룬다면, 극사실주의나 포토리얼리즘 종류의 작품들에서 어떤 예술적인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비평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이런 장르들을 당면하여 개별적인 작가들의 개성을 대개 재현된 사물이나 상황 속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실주의는 화풍이나 양식의 문제가 아닌 시각이나 의식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사실주의가 가진 또 다른 속성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개입을 극도로 차단하는 것이다. 화가는 마치 이 지점에서 기계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스튜디오는 팩토리(공장)가 되고, 작가는 메커니즘의 한 부분으로써 대상과 관객 사이 어딘가 존재할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 위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화면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그의 존재와 행적이다. 물론 이 행적은 표현주의나 추상미술 따위에서처럼 전면에 대두되지 않는다. 그래서 감상자에게는 더 세심하고 냉철한 관찰을 요구하게 된다. 이광호 작가에게 작가의 위치는 어디쯤 될까?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예술작품의 3단계 혹은 3가지 카테고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단순한 모방-형식-양식(Einfache Nachahmung-Manier-Stil)이라고 공식화된 괴테의 이론을 주춧돌로 삼아 예술적 기량이나 수준을 분류해 본다면, 대개 많은 평범한 작가들이 단순한 모방 상태에 머물거나 겨우 형식의 단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대가 정도쯤으로 평가받는 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양식의 차원에 이르거나 양식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양식이란 한 예술가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이고, 그런 예술가들이 후대에 기억되는 인물로 남는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도식적 설정으로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나름 예술적 기량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인식체계로는 의미가 있다. 괴테의 도식 속에서 살펴본다면, 작가 이광호는 두 번째 단계인 형식(manier)에 더 가치를 두는 것 같다. 실상 거의 모든 작가들은 양식이나 양식 형성의 수준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후대의 몫이다. 작가는 자신 앞에 설정된 작업의 물리적 상황에 더 집중하며, 이러한 태도는 형식의 다양성과 개성으로 발전된다. 실제로 감상자는 그려진 대상에—그것이 사실적이건 추상적이건 간에—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현하는 화가의 기술적 방식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술적 방식이 화가들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2. 촉각적 재현(tactile representation)
근세 이후 회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어쩌면 화가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화가의 행위 혹은 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형식이 본격적으로 작가의 시그니처(signature)로 이해되거나 접수된 것은 인상주의 이후이다. 작품 혹은 화풍의 독특함이나 개성은 화면 위의 독창적인 흔적에 대한 이슈가 되어 추상표현주의에서 극단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명한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이다. 흔적에 대한 또 다른 극단은 미니멀아트나, 극사실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미니멀아트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극사실주의는 기계적 재현방식으로 흔적의 개성 혹은 개성적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양극단을 이루었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원리의 궁극주의로 치달으며 제로 그라운드를 형성하였다. 이광호의 작업은 이 상태에서부터 다시금 회화로 전환하는 변곡점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사막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보여준다. 이 풍경들은 작가가 캘리포니아의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Joshua Tree National Park)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전에 작가는 숲, 수풀, 습지와 같은 주제를 연작으로 제작하였다. 작가는 풍경에 따라 그 기법을 바꾼다고 하는데, 이번 주제에 한해서는 좀 더 치밀하고 긴 작업이 요구되었다. 풍경의 종류와 양상들은 작가에게 각각의 의미와 메시지를 담는데, 메마른 지형 위의 바위는 작가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로 수용되었다. 작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위와 거석은 인간이 경험한 최초의 미적 경험 중에 하나인 숭고와 경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선사 혹은 원시미술이나 초기 문명시대의 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통용되는 감각의 역사이다. 이를테면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그의 저작 『오버레이』(Overlay, 1983)를 통해 영국의 오래된 돌무덤을 보면서 체험했던 순수한 미적 체험과 지각 속에서 현대미술과의 연관성을 찾았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광호도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풍경에서 경외를 체험했으며, 주술적 기원과 명상에 이르기도 하였다. 동식물과는 달리 광물성 풍경은 생물학적 존재의 시간을 넘어서는 영속성 그 자체였고, 일상적 존재인 작가에게 신비로운 대상으로 다가왔다. 나아가 작가에게 바위풍경은 인격화된 자연으로 해석되었다. 풍경이 보여주는 굴곡과 주름은 마치 인간의 몸과 피부를 연상시키고, 작가의 감각기관은 주술적 차원을 넘어서 에로티시즘의 영역에까지 이르렀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예술의욕에 불을 지폈다.
 
작업의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진을 광학적인 기구(빔프로젝터)를 이용하여 빈 캔버스에 투사하고, 간단한 스케치로 형태와 외곽선을 옮긴다. 이후 사진에 입각한 재현은 곧 회화적인 행위과정으로 전환된다. 작가는 ‘transparent white’를 주로 사용하는데, 팔레트 위에서 작가는 색의 명도를 높이거나 부드럽게 하기 위해 흰색을 배합하는 것을 자제한다고 말했다. 유화에서 주로 쓰이는 티타늄 화이트와 같은 안료는 배제되었다. 그렇게 그는 자칫 탁해질 화면의 색조나 분위기를 조치하였다. 또한 유화의 속성에서 최대한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미디엄이나 오일의 혼합을 매우 신중하게 조절·선택하고, 색의 탄성과 톤의 생생함을 유지한다. 유화를 이용한 붓질에서 붓이 지닌 물성적 상태(붓의 탄력성이나 젖은 상태 혹은 털의 강약 등)를 이용하여 회화적 효과내기가 이 과정에서 집중된다. 작가는 유화가 지닌 질감이나 색감의 한계를 넘기 위해 콜드왁스를 사용하여 붓과 캔버스 천 사이의 마찰과 미끄러짐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하였다. 새로운 재료의 사용이나 기술적 실험은 마치 돌을 쓰다듬는 촉각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므로 매끈해 보이는 화면은 실제로는 치열한 작업의 현장이었다. 이 과정이 작품의 의미와 개성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적인 순간이라고 한다. 실제로 작가는, 필자가 아는 한, 재료나 기법에 대한 실험정신이 가장 왕성한 작가이다.
 
붓의 흔적으로 남겨진 무수한 화가의 손동작들이 화면 위에서 촉각적 표면을 이룬다. 바람과 물에 마모되고, 복사열에 달궈진 사막 바위들의 질감이 신속하고 때론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붓질에 의해 서서히 살아난다. 작가가 이전에 천착했던 인물이나 식물(선인장) 등을 비교해 보아도, 그의 회화방식은 꾸준하다. 그러므로 그의 방식은 선인장을 솜사탕처럼 감싸는 잔털이나 얼굴의 주름과 피붓결 혹은 옷의 질감 따위를 더듬어내는 시선과 그 시선에 상응하려는 기법적 연출이다. 나아가 이는 대상의 표피를 회화의 표면에 이식하려는 작가의 기본적인 예술의욕(Kunstwollen)이라 하겠다.
 
3. 속살과 굴곡: 더듬는 시선
이광호의 작품에 있어 형식(manier)적 특징은 얇은 피막 위에서 펼쳐지는 매끈한 재현이다. 물리적으로 보아도 캔버스 위의 화면은 고르게 얇다. 어쩌면 레이어(층)가 없는 사진의 인화지와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굵고 강렬한 회화성 대신에 이광호의 회화는 세밀하고 투명한 전개를 택했다. 필자는 이러한 회화 현상에 즈음하여 들뢰즈(Gilles Deleuze)의 '주름’(pil) 개념을 소환하고자 한다. 이것 또한 들뢰즈가 푸코(Michel Foucault)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바로크에 즈음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주름은 이중화 작용(doub/ure)의 결과물이며, 이것으로 작용과 반작용, 개체의 속성이 외부와의 갈등으로 파생되는 모든 현상을 읽는다.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조형예술을 설명하는 개념적 도구가 되었다. 주름은 표면을 더듬는 촉각의 근거이다. 작가는 자연이 만들어낸 주름에 집중해 온 것이다.
 
단견에 이광호의 작품은 주름 없는 미학이 대중화된 현 사회에 적절한 회화형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가 매끈한 이미지에 치중한다는 견해는 전술한 반론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의 회화술의 정점은 양감의 최소화와 질감의 극대화이다. 여기서 말하는 질감은 앞에서 다루었던 표면의 촉각적 속성이며, 작가는 표면 질감은 물론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대기의 온도까지 추체험하게 해준다. 이 속성을 재현해 내는 것에 집중한 회화는 그 표면 위에서 주름의 세계관을 야기한다. 이 맥락에서 비로소 촉각적 표면을 형성하는 과정이 자유로운 회화행위로 인식된다. 개체의 표면은 평면이 아니며, 그 결이나 피부 또한 밋밋한 표면이 아니다. 그의 회화적 연금술은 화면 위에서 실제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회화적 원리로 번안하는 힘이다. 이 힘이 우리의 망막에 주름을 발생시키고, 회화 행위의 결과물을 사막의 바위나 선인장 혹은 수풀들을 인지하는 감상자의 망막에 촉각적 감각을 더한다.
 
촉각적 시각은 조망하는 방식이 아니다. 즉 대상에 매우 근접해야 감상에 합당한 것인데, 그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멀게 보아야 더 촉각적인 인상을 준다. 인상주의 회화에서처럼 일정한 거리가 분명한 형상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만, 촉각적 인지라는 개념에서는 역설적이다. 이 역설 속에서 그의 회화는 사실과 회화술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며, 이것은 감상자와 이미지 사이의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마술이 된다.
 
필자는 과거 이광호 작가의 ‘인터-뷰’ 시리즈를 평하면서, ‘메타-사실주의’란 개념을 애써 설정해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사실주의란 그 자체로 메타포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사실주의는 사실이 아니며,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개념의 결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이광호의 사실주의는 완벽한 재현을 형식의 틀로 삼으면서 그 형식을 자유롭게 혹은 임의적으로 이탈한다는 점에서 필자가 설정한 개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을 인지하려는 감상자의 시선은 그가 작업한 결과로써의 화면 뒤에 있거나, 혹은 반대로 사실적 이미지들 속에 숨겨진 작업행위의 지층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현의 목적인 사실적 이미지 재현이란 맥락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회화행위를 남긴다는 점이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 연금술이라 하겠다.
 
 

김정락(미술사학자)

《이광호》(2020, 조현화랑 부산) 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