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가라, 그 무엇도 거부하지 말고, 선택하지 말고 – 존 러스킨(John Ruskin)
이 독수리는 어디서 온 것이며 어떻게 이곳에서 발견된 것인가? –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한국 현대화단에서 구상화라는 범주는 꾸준히 대안적인 성격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각종 불평등을 고발하는 정치적 발언으로서의 미술계열에 가려져 있으며, 그전에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다채로움과 비엔날레형 스펙터클들의 이면에 있었고, 그 전은 영상, 그리고 6-70년대는 추상화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구상화라고 하면 표현주의, 민중, 일부 팝아트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하게 사실주의적 또는 자연주의적 화풍으로 좁힌다면 딱히 사조나 대표작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엄격한 아카데미즘에 입각해 수년에서 십수 년에 이르는 모델링과 음영 기술의 취득을 미술가의 기초여건으로 삼아온 한국미술 전공 교육의 역사와는 어긋나게, 화단에 데뷔한 이후에도 진솔한 사실주의적 화풍을 지속하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 원인 중 하나로 고질적 병폐인 추상화 우월주의를 의심해 본다. 사대부 문인화의 딜레땅띠즘(dilettantisme) 선호의 결과인지 간판쟁이 멸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공들여 그린 풍경이나 정물화에는 허용되지 않는 모종의 ‘정신성’이 단색 물감이나 몇 번의 붓질로 마무리된 추상화에는 어느새 스며들어 간다는 주장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듯하다. 20세기 초 세계적인 모더니티의 강세, 1945년 이후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선전(善戰)과도 무관할 수 없는 국내 추상화의 약진은 서구 현대미술에 동양식 ‘선(禪)’ 사상을 걸친 제스처이면서 물감의 순수하게 물리적인 조건에 주목한 물질주의 등이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
뛰어난 사실주의 작가가 드문 본질적 원인은 무엇보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의 화가 척 클로스(Chuck Close)는 초상사진을 거대한 캔버스에 옮기는 자신의 작업의 길고 고된 과정에 대해 논하면서, 자신이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이었다면, 캔버스에 밑칠만 하면 작업이 완성되었을 것이고, 또 자신이 아그네스 마틴(Agnes Marin)이었다면, 밑칠 위에 균등한 그리드(grid)만 그으면 작업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작업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술제작에 있어서의 노동집약성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드리울 필요는 없지만, 사실주의화가가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제작에 들어가는 노고의 부담 때문이다. 그에 보태 노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리는 능력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모르나 잘 그리는 능력도 갖추면서 척 클로스와 같은 인내와 꾸준함이 뒷받침되어야 사실주의화가가 될 기본사양을 겨우 충족하는 것이다.
사실주의의 또 다른 어려움은 키치와의 간극에 기원한다. 아트 페어에 가면 사실주의에서 트롱프뢰유(Trompe-l'œil)로 전락한 유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미술시장에는 존재하지만 미술사에는 남지 않을 동어반복적 작품들은 대중을 매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지한 사실주의 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방식을 퇴색시키는 부류로 경계해야 할 형식들이다. 단순히 효과만을 추구하는 그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본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한다는 미술의 기본적 모순에 대한 고민과 연구의 태도가 끊임없이 요구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현실성과 그리고 있는 물리적조건의 현실성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알고리듬(algorithm)과도 같이 신경과 명령의 회로를 타고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의 눈이 보는 대상과 그의 손이 그려내는 대상 간의 계산과 타협, 반올림과 반내림의 반복, 궁극적으로는 눈과 손의 상호 설득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작품으로 남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호의 근작들은 작가의 25년에 가까운 현실과의 치밀한 협상의 결과임을 여실히 하는 역작들이라 하겠다. 그가 인물과 선인장을 거쳐, 2013년경부터 뚜렷하고 선명한 숲,—과거의 흐르듯 관망하는 대상이 아닌—실존하고 현전(現前)하는 거대한 숲이라는 테마를 다루게 된 이래로 그 작품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감이 자리 잡게 된다. 손에 잡힐 듯한 과장된 눈속임의 환영이 아니라 냉철하고 명쾌한 숲의 모습이 물감을 매개하여 화면 속 자기 자리를 찾아간 듯한 논리적 현실이다. 실제의 숲도, 굳어버린 물감도 아닌 제3의 새로운 현실이 관객의 망막과 거래하듯 작품 표면에 맺혔다 사라지고 또 옮긴 시선 끝에 비췄다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작품 앞에 선 사람은 시각이 받아들이는 환영에 설득당하고 싶은 유혹과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수의 붓자국들이 정보로 지각되어 견제하면서 아득한 숲과 숲속에 서 있었을 작가의 시선, 그리고 작업실에서 보낸 작가의 시간이 동시에 호소하며 압도하는 듯한 환각에 휩싸인다.
마치 가상현실(VR)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이 벽처럼 납작한 화면 속으로부터 작가가 현장에서 직접 느꼈을 시각과 감수성이 비슷한 투명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19세기 경험적 사실주의(empirical realism)로 불렸던 인상파 화가들은 감각(sense)에의 의존도가 높았다면 이광호의 경우 그런 변수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경험은 관객의 몫이라 오해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단호한 화면 내의 논리에 따라 균질적으로 경험의 테두리를 결정짓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이 그렇듯 거역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엄격한 질서가 우선되고, 우리에게는 작가가 그의 시각과 작업의 고통으로 제공하는 경험만이 허락될 뿐이다.
4년 전의 국제화랑에서의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스스로의 시각과의 싸움임을 명확히 했다. 그의 눈은 어떻게 보일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보여야 마땅하다라는 학습된 지식이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보여준 것이다. 작품 속에는 그가 볼 수 있는 범위와 그려내는 화면 위의 좌표 사이의 거래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미지를 상징 또는 추상화시키지 않아 왔으며, 대상을 정하면 캔버스의 모든 표면이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하도록 강요해 왔다. 곶자왈의 가시덤불 숲을 그린다는 것은 광기어린 새엄마가 신데렐라에게 시킨 불가능한 심부름 같지만, 이광호의 경우 그것이 스스로에게 가한 과제였으며, 덤덤히 하루 8시간 이상 자리에 앉아 문제를 해결해 갔다.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25년의 숙련, 그리고 그의 고집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밤의 곶자왈을 그린 작품을 전시한 2층 전시장을 어둡게 설정했을 때, 작가가 갖는 화면과 현실과의 관계는 한 층 더 명확해졌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눈앞의 장면도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기 힘든 현실이 있는 것이다.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 단 그 칠흑과의 싸움을 그는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존재를 인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은 그릴 수도 안 그릴 수도 없다. 딜레마가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의 투쟁은 감정이 개입된다. 칠흑 속에서 어두움은 공포를 동반하고, 공포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작가의 부담감은 심리를 자극한다. 이 모든 갈등이 어두운 숲 속에 투영되면서, 그 숲은 단순히 초월적일 뿐 아니라 깊고 침통하며 결코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절망으로 유인한다. 동시에 관객은 작가의 시선뿐 아니라 납덩이를 삼킨 듯한 마음까지 공유하게 된다.
2016년 이후의 신작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밝고 몽환적이며 조금씩 서술적인 성향이 드리운다. 신작들은 주로 뉴질랜드의 초원과 늪(wetland)을 배경으로 한 작업들로, 숲이라는 공간의 부피(높이와 깊이)를 보장받았던 곶자왈과는 사뭇 다르게 주로 수평적인 광대한 평면 지형을 어떻게 구획 짓는가 라는 도전이 함께 한다. 일견 개방적인 구도가 전개될 듯하지만, 전체 작품군에서 하늘이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은 결코 높지 않다. 시선은 눈높이나 그 아래로 향해 있는 것이다. 작가는 또다시 원시적 풍경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뉴질랜드 지형의 특성이기도 한 늪지대는 거의 항상 화면 꼭대기까지 캔버스 전체에 가득 차게 묘사되어 있다. 노랑부터 보랏빛까지의 다양한 이름 모를 화초들이 흐드러져 엉킨 생태계는 늪이라고 부르기엔 과하게 화려한 눈에 익지 않은 선명한 빛깔의 조합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도무지 구조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육지의 조각들은 혼란스럽게 수면을 가르거나 에워싸면서 피난처 없는 우리의 시선이 핀볼의 은빛 구슬처럼 화면의 구석까지 골고루 도달했다 튕겨 나와 또다시 미끄러져 반사되도록 유도한다. 그러는 중에도 곳곳의 수면의 경계, 수풀의 반사와 노이즈처럼 퍼진 가늘고 긴 수초의 그림자들은 흔들리지 않는 현실감(verisimilitude)의 닻처럼 순간적으로 사실주의적 초점을 맞추면서 현장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늪 외의 대상들은 밝은 황갈색의 초원에서 펼쳐지는 풍경들로, 바닥을 뒤덮는 터석(tussock)이라는 자생식물의 길고 가는 황금빛 줄기들이 주는 혼미(昏迷)한 인상이 특징적이다. 가끔씩 하늘도 비추고 멀리 있는 장대한 산세도 원근을 느끼게 하여, 수평한 수면이 수직의 화면과 일치하는 내려다보는 구도의 늪에 비해 우리와 풍경을 각각 객관화시키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듯한 관망을 가능하게 한다. 산을 관망하는 주체는 하나 더 있는데, 초원을 그린 과반수의 작품 속에는 풍경을 주관하는 꿩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이는 얼핏 인위적으로 더해진 장식적 허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현실 속에 위치했던 경험적 존재이며, 실존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단 꿩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는 작품을 바라보는 어느 누구보다도 풍경 속 현실에 가깝게 속해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부득이하게도 화면 속에 웅크리는 꿩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그 화면은 꿩과의 관계성을 산정하게 된다. 화면상의 위치, 크기, 색조 다음에는 의미, 상징성, 타당성 등 갑작스럽게 풍경은 자연이라는 현실과의 관계보다도 압도적으로 꿩과의 관계를 통해 읽히게 된다. 단, 꿩의 이미지 외에는 그 어떤 부수적인 설명도 주어지지 않기에, 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떤 답변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조류는 과거부터 사람들의 여러가지 욕망의 투영의 대상이 되어왔다. 평화, 행운, 액운, 금술 등 친숙한 듯하면서도 금세 날아가 버리는 새들에 대한 인간의 신비감과 이로 인한 기대치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꿩에 대해 민속학적 풀이에서부터 수렵의 역사 등등 무궁무진한 호기심이 자극되는 것은 사실이다. 단 화면 속에 주어진 시각적 진실성(integrity)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호기심이 충족될 수 있을지 어려운 과제이다.
프로이드는 미술사학자는 아니었지만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그림들 중 가장 살가운 성가족(聖家族)의 표현인 〈성모자와 성안나〉(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 Anne, 1501-1519) 속에 숨겨진 새의 도상에 대해 장황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가 특기로 하는 꿈이야기에 바탕 한 심리분석에 따르면, 작품에 어렴풋이 비추는 새는 다빈치의 현재와 유년기, 어머니와 다빈치, 여성과 남성을 잇는 존재로 상징되어 그의 삶에 대한 고백이 성가족의 초상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는 프로이드의 논점에 대해 다 빈치의 어린시절의 꿈이야기의 신빙성에서부터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새의 종류의 오역(誤譯)등 차례로 반박하며 마찬가지로 장황한 답글을 제시하였다. 아름다운 그림을 충분히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단된 두명의 천재들의 일화는 정작 다 빈치 화면에 드러난 성안나와 성모, 아기 예수와 어린양의 성스러움과 소중함을 만끽할 기회를 앗아간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 곁에 몇 점 남겨지지 않은 다 빈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절정기 르네상스의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과 깊은 애정과 수학적 이성이 살아있는 기적과도 같은 장면임에도 이제는 화면 속에 갇힌 푸른색의 새 부리와 꺾인 날개가 먼저 눈에 뜨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역시 이광호 화면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 마리 꿩에 대해 그 색이나 성별, 상징이나 역할 및 작가의 유년기 이야기를 파헤치는 것이 작가를 위해 필요할 수는 있으나 아직까지 관객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법하다. 단, 곶자왈의 비가시성을 그려내기 위해 보이지 않음을 묘사하고, 보이지 않는 환경을 정확하게 구현해 낸 작가이기에, 일부 배경에 잠식되어 있으면서도 선명하게 가시화된 꿩의 존재는 그가 그려내는 가시덤불이나 수초만큼이나 진실된 존재일 것으로 상상된다. 생태학이나 생물학적 진실은 아닐 수 있으나, 작가에게는 절실한 심리적 진실이라고 할까. 꿩이 있는 풍경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지연된 현시(顯示) 욕구의 발현이자 곧 다가올 비약을 위해 사면초가의 숲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 풍경의 주재(主宰)자이다.
정신영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