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새로운 풍경 연작을 본 후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17세기 유럽에서 이상적인 미적 정경을 지칭하며 등장한 개념이었지만, 그 자체로 그림과 풍경 간의 상관관계를 함축하기도 한다. 이상적 아름다움을 풍경을 통해 포착했던 그림들로 인해 관자들은 풍경에 회화적 프레임을 적용시키는 시각을 내면화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경탄할 가치가 있는 어떤 장면을 ‘그림 같다’고 인식한다. 풍경과 그림과 관자 사이의 이러한 상호교섭의 상태는 때로 풍경화에서 우리가 풍경을 보는 것인지 그림을 보는 것인지를 모호하게 한다. 내가 이광호의 작품에서 본 것은 과연 풍경일까 그림일까?
이광호의 근작들은 내밀하고 밀도 높은 숨결을 발산하는 인적 없는 숲을 포착한 풍경화이다. 덤불이 얽힌 제주도의 곶자왈 숲을 주로 그린 이 작업들은 분명하게 현실의 풍경을 전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부드럽고 속도감 있는 붓질, 중첩하고 덧붙이고 긁어낸 수많은 터치들, 습윤한 물감이 전하는 다채로운 물질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것은 여전히 현실 속의 어떤 숲이다. 하지만 이 숲의 리얼리티를 결정적으로 나에게 전하는, 살아있는 듯한 숲의 인상은 숲속 대상들이 원래 가질 법한 분명하고 확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자가 더듬거리며 이어 나간 듯한 붓질들의 쌓임을 통해 체현된 것이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숲의 사진들이 전해주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탐색해 가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림은 풍경에 다가가고, 풍경은 그림이 된다.
이광호가 《회화술》(1998, 덕원갤러리)이라는 전시에서부터 ‘인터뷰(Inter-View)’의 인물화 연작, ‘선인장’의 정물화 연작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문제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온 작가라는 맥락에서 볼 때, 풍경화로 이동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자연 풍경은 현실 속 장면인 동시에 도시 공간과는 다른 미지의 신비로움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현실과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는 그림의 지위와 매우 유사하다. ‘풍경’이라는 개념에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위치가 적극적으로 개입된다. 부감법과 같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관념적 시선을 제외한다면, 인간의 신체 범위 보다 큰 현실의 풍경을 경험적으로 그릴 때 관자의 시선은 언제나 그 풍경 안에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의 위치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대상화할 수 있는 정물에 비해 보다 깊은 주관성을 풍경에 개입시킨다.
풍경에 대한 이광호의 관심은 2010년 선인장 연작을 중심으로 한 국제화랑 개인전에서 몇 점의 작품들을 통해서 예고되었고, 2012년 소소 갤러리의 개인전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소소 갤러리에 전시된 풍경 작업들에서는 대상의 객관적 재현에 기반 한 선인장 연작에 비해 풍경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감흥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숲이 발산하는 아지랑이처럼 흐드러진 선의 흔적들은 잠깐의 여행이 주는 가벼운 흥취의 감정과 같은 어떤 기대감을 분출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대상에 집중한 선인장 연작에 요구되었던 빈틈없는 완성도의 무게에서 벗어난, 아직 실체를 모르는 세계에 대한 탐색의 자유로움에 고무된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의 의지로 대상을 온전히 정복한 듯 한 선인장 연작에 비해, 그리는 대상을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더듬어가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었다. ‘어루만지다’라는 전시제목은 이런 견지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광호의 작업 과정은 회화에서의 환영과 재현, 시선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탐구한 연작들을 시작으로 하여, 도상학의 맥락을 활용하여 작가의 감정을 특정 대상들을 통해 표현한 작품들, 인물의 실체를 포착한 ‘인터뷰’ 연작, 정물을 탐구한 선인장 연작, 그리고 현재의 풍경화에 이르기까지의 스스로에게 부과한 단계적 과제들을 하나씩 완수하듯이 진행되어 왔다. 특유의 성실함도 이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했겠지만, 무엇보다 화가로서 그를 이끈 것은 자신의 회화적 기술이 대상의 궁극적 실체와 일치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구체적 호기심을 가지고 집중 탐구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는 ‘인터뷰’ 연작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연작에서는 인물의 눈빛이나 특유의 표정, 미묘한 포즈와 같은 요소뿐 아니라, 의상이나 소지품과 같은 객관적 사물까지도 인물의 특질을 전하는 하나하나의 시각적 기호로 작용한다. 그려진 인물을 직접 아는 관람자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가적 해석의 은밀한 치밀함은 화가의 눈과 대상의 객관적 실체 사이의 거리를 회화적 재현을 통해 얼마나 좁힐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태도로 보인다.
인간이 아닌 자연 대상물로 이행한 선인장 연작에서 그는 객관적 대상과 주관적 해석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다 능숙하게 다루었다. 선인장을 관능적이고 동물적인 대상으로서 바라본 작가적 해석은 재현적 기술의 확고한 완성도로 인해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을 획득하였다. 선인장이면서도 종래의 선인장은 아닌 그 이미지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한 존재감이 획득되는 이 지점에서, 붓질의 무게는 대상의 무게로 전환되고 회화적 완성도는 대상의 밀도가 되었다. 회화적 완성에 대한 작가의 욕망이 선인장의 관능성과 일체화된 이 지점에서 이광호는 자신 밖의 풍경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불확실성의 탐구라는 새로운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다.
인적 없는 숲에 개입되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은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보다 많은 선택과 결정을 요구한다. 숲이라는 시공간 속에서는 나무나 덤불의 형태나 크기뿐 아니라, 빛, 냄새, 대기, 바람, 소리와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촉발되는, 결코 확정적일 수 없는 미묘하고 풍성한 감정의 결이 형성된다. 이광호는 숲에서 그가 경험한 위안, 자유로움, 경이, 불안과 같은 다양한 정서적 질감들이 얽힌 숲의 세부들을 하나하나 붓질로 더듬어가면서, 예측할 수 없고 정복하기 어려운 숲의 실체에 닿고자 했다. 그 과정을 통해 그가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며 마침내 포착한 숲의 상은 언뜻 극사실적 재현으로 보이지만, 다가가서 볼수록 작가의 신체적 감각과 결합한 주관적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 이광호의 작업실에 처음 방문했을 때 개념적 형태만 있어 보였던 그림 속 숲의 장면들은 두 계절이 지나 그야말로 온전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주관적 감정들과 결합된 숲의 질감들을 불확실함 속에서 하나씩 붓으로 만져나간, 화가의 감각적 본능에 따르는 붓질들의 서사적 결과로서 형성된 물질감의 무게. 바로 그것이 단순한 어떤 장소의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 숲일 수 있는 리얼리티를 전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잘 구사하는 회화적 기술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여전히 모르고 있는 숲이라는 시공간의 위험성에 몸을 던지고 더듬더듬 찾아나간 과정 속에서 어느덧 실체를 찾은 듯한 생생함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두뇌의 개념이 아니라 화가의 촉지적 감각으로 찾아 낸 장면의 물질적 순수함에 대한 확신이 선사하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광호의 작업들을 ‘그림이 풍경이 된 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화가 자신만이 아는 방식으로 완성한 풍경의 ‘진실’이 회화적 재현이 전하는 ‘사실’과 만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