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에는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에게서 응답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내재해 있다. 이 기대가 응답되는 곳에서는 아우라의 경험이 충만하게 이루어진다… 시선을 받은 사람이나 시선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선을 열게 된다.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대하여”)
초기작 〈나의 그림〉(1996), 〈동물원〉(1996), 〈야유회〉(1996), 〈세 사람〉(1996), 〈MK의 점심식사〉(1995)에서 이광호 작가의 시선은 한 인물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인물의 시선은 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는 늘 거기에 없었다.”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선의 응답을 갈구하는 장치들을 그려 넣지만, 결국 이 작품들은 응답받는 데 실패한 시선의 흔적들이다. 시선에 응답하지 않는 세상은, 그래서 이 그림들에서 낯설고 차갑게 그려져 있다. 응답받지 못한 시선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 마련이다. 일방적인 시선만 던지고 있는 자기 자신이 고통스럽게 의식되기 때문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처럼, 응답받는 시선이 아우라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면, 응답받지 못한 시선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낳는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욕망이 오늘날의 화가 이광호를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Inter-View’는 이광호 작가의 작업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다 준 프로젝트다. (이광호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작가는 초상화를 그릴 사람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린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그려지는 사람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더구나 의뢰를 받는 대신 작가 스스로 그려질 사람을 선택하고, 그러고도 그들에게는 완성된 초상화를 건네지도, 팔지도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음으로써 이광호는 화가가 갖는 이 권력을 최대로 강화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작업실로 불러 그림을 그리는 동안 붙들어 놓을 뿐 아니라, 의뢰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들을 향해 원하는 만큼의 시선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화가의 독재자적 시선을 한껏 휘두를 수 있게 해 준 이 영리한 프로젝트는 이광호에게 화가의 시선이 갖는 내밀하지만, 막강한 힘을 의식하게 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려지는 사람에 대한 화가의 외적 권력을, 그를 그리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은밀한 내적 전유와 결합시키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는 그의 얼굴을, 이마와 코, 눈과 입술을, 그의 살결을, 한마디로 그 신체의 모든 세부를 세심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화가에게 기억된 그 신체의 모든 세부들은 붓을 든 화가의 손을 통해 한 줄 한 줄, 때로는 한 점 한 점 캔버스 위에 그려진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화가의 시선이 기억한 피사체의 신체가, 붓을 든 화가의 손을 통해 상기되는 관능적 과정이기도 하다. 화가의 손은, 그 어떤 손보다 섬세하게, 그의 얼굴을, 그의 살결을, 그려지는 신체의 모든 세부를 ‘더듬는다’. 피사체를 향한 화가의 독재자적 시선은, 피사체를 묘사하는 손의 섬세한 애무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광호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는 피사체를 더듬고, 만지고, 두드리고, 쓰다듬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러한 촉각적 전유를 통해 작가는 피사체를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광호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촉각성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것은 그리는 과정에 충족된 화가의 촉각적 욕망의 결과물이다.
이는 선인장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선인장 그림을 보고 이광호를 ‘사실주의 화가’라 부르지만 내 생각에 이는 정확한 규정이 아니다. 그의 선인장은 사실주의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실제 같은’ 느낌은,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이 그림의 사실주의적 외관은, 그려지는 대상을 촉각적으로 전유해 내는 이광호 화가 특유의 작업 결과일 뿐이다.
그가 그린 선인장들은 보는 사람들에게 뭉글뭉글하고 꿀렁꿀렁하며 까칠한 촉각적 감각을 일깨운다. 우리는 마치 살갗에 닿기라도 하듯 간질거리거나, 찌르며 꿈틀거리는 선인장의 육체를 만난다. 하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선인장은 우리가 그를 더듬고, 만지고, 쓰다듬는 걸 거부하는 가시 달린 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림 속 선인장은, 어떤 다른 대상보다 촉각적이지만 그 촉각성은, 더듬고, 만지고, 쓰다듬을 수 없게 하는 가시로 뒤덮여있다. 여기서 촉각적 욕구는 선인장의 촉각 불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우리의 촉감을 자극하지만 만질 수 없는 대상, 만지고 싶지만 만지지 못하는 대상. 우리의 촉각적 욕구는 이렇게 중단됨으로써 한 단계 더 강렬해진다. 선인장 그림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만지고 싶으나 만질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기에 만져보고 싶은 욕구는 더 증폭된다. 선인장 그림이 우리에게 발휘하는 힘은, 촉각적 욕구를 좌절시키면서 바로 그를 통해 우리를 촉각적으로 유혹하는 역설에서 나온다.
선인장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가 보기에, 선인장의 가시다. 가시는 이 그림이 사실주의로 분류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이기도 하다. 화가는 사진으로 찍어온 선인장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특히 솜털 같은 가시들이 무수히 덮여있는 선인장의 가시 하나하나를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예술적으로도 무의미한 일이다. 이 가시들은 재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니들을 든 화가의 손이 자유롭게 캔버스 표면 위를 움직여 다니며 만들어낸 흔적들이다. 바로 여기에 가시가 갖는 중요성이 있다.
이광호 화가는 흰색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물감에 미디엄을 섞어 옅거나 짙게 만들어 명암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유화 화가들이 밝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 물감을 섞어 넣는 것과는 반대다. 흰색 물감을 섞을 경우 그려진 부분은 더 두터워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에서는 밝은 부분의 물감 두께는 어두운 부분보다 더 두터워지고 물감의 점도도 더 강해진다. 이와는 반대로 이광호 화가의 그림에서는 밝은 부분의 두께가 어두운 부분보다 얇고 점도도 더 약하다. 그의 그림에서 밝은 부분은 이렇게 얇게 펴 바른 물감을 관통해 캔버스의 흰색이 드러나면서 생겨난다. 그 중 가장 밝은 부분은 아예 니들로 물감을 벗겨냄으로써 생긴 것이다.
이광호 화가는 나에게, 고무 붓이나 니들로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벗겨낼 때’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미 그려놓은 그림의 표면을 고무 붓으로 뭉개거나 니들로 긁어내는 일은, 붓으로 어떤 형태를 그려 만들어 내는 것과는 정반대인 탈 형태적 행위다. 그건 이미 그려진 것을 뭉개고, 망가뜨리며, 파괴하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종류의 파괴 욕구가 있다. 누군가 오랫동안 한 알 한 알 모아 만든 모래 그림을 흐트러버리고 싶거나, 힘겹게 쌓아놓은 물건들을 쳐서 와르르 무너뜨리고 싶어질 때 우리는 우리 내부 깊숙이 잠자고 있는 이런 욕망을 깨닫는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문명이 그런 파괴적 욕구의 억압 위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문명사회에서 자라고 사회화된 우리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욕구를 억압하고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들에게서 그 욕구가 규제되지 않고 터져 나오는 모습을 마주치곤 한다. 그런데 문명화된 사회의 한 복판에서, 그것도 다 자란 어른들에게, 그런 파괴적 욕구의 발산이 허용되어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것이 예술이다. 화가 이광호는 예술에 주어진 이러한 진귀한 자유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충실히 활용한다. 붓을 든 손이 애써 형태를 잡고 색을 칠해놓은 캔버스 표면 위에서, 니들을 든 손은 그렇게 그려진 것들을 무너뜨리고, 뭉개고, 긁어낸다. 그 손은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파괴 욕구를 만끽한다. 선인장의 가시는 바로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 가시는 화가의 촉각적 욕망을 충실하게 충족시킨 결과물이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의 촉각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광호 화가는 이제 나무와 풀, 넝쿨들이 서로 어지럽게 얽혀있는 곶자왈의 덤불을 그린다. 그는 제주도 곶자왈에서 찍어온 사진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면서 대형 캔버스에 옮긴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작업은 그의 작업이 사실주의적 재현을 향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다. 원시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지럽게 얽혀있는 넝쿨과 나뭇가지들에는 특정한 사물이라 말할만한 구획된 대상이 없다. 사람이나 선인장과는 달리 여기에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구획된, 그래서 ‘이것이다’라고 지칭할 수 있는 완결되고 자기 폐쇄적 대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넝쿨들과 엉키고, 눈으로 덮인 바닥은 뿌리들 사이 사이로 얽혀 들어가 있다. 여기서는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 등걸을, 나무에서 뻗은 가지와 그 가지를 휘감고 있는 넝쿨을 서로 나누고 구분할 수 없다. 서로 뒤엉킨 넝쿨과 나뭇가지, 반쯤 녹아 흙과 뒤섞인 눈, 늘어진 나뭇잎과 구별되지 않는 지면의 식물들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오직 배경의 하늘과만 대비되어 있다.
곶자왈의 나무 넝쿨과 덤불 덩어리는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재현하려면 우리는 그 대상 바깥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내 눈 ‘앞’에 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곶자왈의 풍경은 그렇지 않다. 화가는 곶자왈 덤불의 ‘바깥’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덤불들 ‘속’에 있는 것은 넓게 이어져 있는 다른 덤불들의 앞이나 뒤에 있을 뿐이다. 물속에서는 자신의 주위 전체를 채우고 있는 물 말고는 ‘무엇’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듯, 곶자왈 덤불 속에 들어와 있는 화가에게 모든 것은 그저 덤불일 뿐이다. 그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그 덤불의 ‘분위기(Atmosphere)’를, 붓을 든 화가의 몸짓을 통해 묘사할 뿐이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덤불 ‘속’에 있다. 덤불은 화가에게도, 거대한 캔버스의 그림을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바깥이 아닌 ‘속’에 있기만을 허용한다. 이전 작업과 비교해 보자면, 화가가 자신이 그리는 것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진전일 수 있다. 캔버스 표면 위에서 붓과 니들로 피사체의 살갗을 만지고 긁던 화가가, 급기야 그 피사체 ‘속’으로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붙들려’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화가는 거대한 캔버스가 묘사하는 덤불의 ‘분위기’에 붙들려 있다. 이런 상황은 밤의 덤불을 그린 그림에서는 더 극대화된다. 어두움은, 그렇지 않아도 그사이를 뚫고 걸어가는 것을 힘들게 하는 덤불의 비투과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거대한 덤불 그림들 사이에 선 관객은 스스로 그 덤불 속에 붙들려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붙들림은 이번 작업 과정에서 한때 작가를 엄습했다던 위압적인 막막함과 무력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화가 이광호는 경탄할 만한 해법을 찾아내었다. 그로부터 애써 빠져나오려는 대신, 그 속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그리면서 충족되는 촉각적 욕망을 향유하는 것이다.
난 무척 운이 좋게도, 이광호 화가의 내밀한 작업 과정을 옆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빈 캔버스 위에 그가 찍어온 곶자왈의 사진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투사한 후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다. 그 이미지 자체에 뚜렷이 구획될 만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캔버스 전체에 분포되는 밝음과 어두움을 연필로 표시해 놓은 이 밑그림은 마치, 어떤 물결이나 진동의 흔적처럼 보였다. 그는 캔버스의 한쪽부터 물감을 칠해 나가기 시작한다. 미디엄이 적게 섞인 어두운 색깔의 물감은 더 뻑뻑하고 끈적하다. 반대로 밝은 부분을 칠하기 위해 미디엄을 더 많이 섞을수록 물감은 옅고 투명해지고 붓의 느낌은 더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밝은 부분을 칠하는 화가의 손은 캔버스 위에서 더 매끄럽게 움직이며, 얇기에 투명도가 높은 물감을 통해 캔버스의 흰색은 더 많이 드러나 보이게 된다. 그리고 나서 화가는 고무 붓을 들어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을 뭉개고 문지른다. 잠깐, 아주 잠깐, 화가의 허락을 받아 고무 붓으로 문지를 때의 느낌을 직접 느껴보았다. 아! 그 매끄럽고 부드러운 촉각적 감각은 지금까지 내 손에 닿았던 어떤 것에서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관능적이었다. 그렇게 물감을 휘젓고 문지르면. 붓 자국이 남긴 구획들은 사라지고 물감은 캔버스 표면의 흰색과 뒤섞여 부드러운 질감의 표면으로 바뀐다. 마침내 화가는 니들을 손에 잡고 뾰족한 끝으로 캔버스를 긁어대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힘을 주면 캔버스에 구멍이 나거나 찢어질 수 있으니 적절한 힘으로 물감을 긁어내 흠집을 낸다. 그러면 니들로 긁힌 부분들에서, 물감이 덮고 있던 캔버스의 흰 속살이 날카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광호 화가는 언젠가,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는 대신 만지면서 느껴지는 촉각적 감각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촉각은 시각보다 훨씬 직접적인 감각이다. 시각이 물리적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하는 안전한 감각이라면, 우리의 몸을 직접 대상과 접촉해야 얻어지는 촉각적 감각은 그만큼 더 위험부담이 크다. 내가 만지는 대상이 그를 만지는 내 신체에 손상을 입힐 수도, 무엇인가가 내 신체로 옮아올 수도, 무언가 날 불쾌하게 할 물질이 내 신체에 묻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촉각으로 감지하려는 사람은, 그만큼 세상에 대한 더 큰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체와 세상의 신체 사이의 근원적인 낯설음을 극복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광호 화가의 작업은, 세상과의 촉각적 조우를 위해 이 낯설음을 극복해 온 과정이었다. 시선을 통해 피사체를 만지듯이 더듬고는, 눈이 기억한 그 촉각적 감각을 캔버스 위에서 손으로 재생하고, 실행하며, 충족시키는 것을 통해서.
화가 이광호의 그림은 촉각적 ‘착각’을 불러내기 위해 시각적 기교를 부리거나, 촉각적 ‘느낌’을 주기 위해 시각적 효과들을 연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 그림들은 촉각적 효과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가는 시선을 통해 촉각적 감각을 발견하고, 촉각적 욕망을 활성화시키고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를 충족시킨다. 그는 만지듯이 보고, 보면서 (그리면서) 만진다. 이러한 점에서, 화가 이광호에게 그리는 행위는 그 행위 바깥에 있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그것이 수행되는 동안 이미 목적 안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행위를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고 부르고, 목적 지향적으로 수행되는 행위보다 우위에 두었다. 놀라운, 아니 어쩌면 당연한 사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그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화가를 충족시켰던 아찔한 촉각적 향유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남시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