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의 덤불 그림들이 갤러리 소소에 차분하게 걸려 있었다. ‘어루만지다’라는 범상치 않은,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떠 올릴 때 놀랍지 않은 제목의 이번 전시에 작가는 덤불 풍경만을 내 걸었다.
‘어루만지다’라는 이 ‘따뜻한’ 전시 제목은 언어학자 고종석의 저서 『어루만지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2009)의 제목에서 왔다. 고종석은 서양의 ‘Love’라는 단어가 상기시키는 단편적인 사랑의 개념을 뛰어넘는 다원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우리말로부터 기인한 에로스’를 각 단락 아래 섬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가볍게 쓰다듬어 만지다’라는 뜻의 순우리말 ‘어루만지다’는 ‘사랑이란 결국, 온갖 꼴로 드러나는 어루만짐’이라고 보는 저자에 의해 표제로 선택되었고, 온유한 사랑을 묘사할 수도 은유적으로 쓰여 성인 간의 사랑을 묘사할 수도 있는 이 단어를 이광호 또한 전시 제목으로 선택하였다.
‘어루만지다’의 다의성은 이광호의 작품과 부담 없이 어우러진다. 그간 작가가 그려 낸 인물과 선인장의 느낌을 ‘Touch’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선보인 덤불숲의 느낌은 ‘Touch’의 순간성을 넘어 머무르며 위로하며 연대를 표하는 감성적인 사랑의 어루만짐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풍경화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의 경치 즉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이광호가 그려낸 한라산 허리 중산간 지역의 덤불의 모습은 어느 순진한 음유시인이 뱉어낼 법한 이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선별된 이광호의 풍경은 모두가 위안을 구하고 싶은 숲의 개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넝쿨에 가까운 잔가지와 이파리들이 마구 뒤 섞여 형성된 거대한 덤불은 바람에 몸을 맡기며 흐느적거리며 덩치를 쌓아가는 동물적 이미지에 가깝다. 휘몰아치는 사랑의 욕망이 증폭된 격정의 무대였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을 상기시키는 이 덤불숲은 그것이 봄의 풍경이든 가을의 풍경이든 고요하게 몰아치고 우직하게 속삭인다. 작가는 어수선하고 엉클어진 수풀의 형상을 눈길로 쓰다듬어 촉각적으로 재현하고, 극과 극은 상통하듯이 다듬어지지 않은 덤불의 거칠고 말초적인 형태는 직설로서 순수하게 욕망을 표현한다.
지난 몇 해 동안 작가가 탐구해 온 풍경 이미지가 자신이 포착한 사진의 이미지를 ‘충실하게’ 풍경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면 이번에 그려낸 덤불의 풍경은 풍경화로서의 가치보다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품은 듯 보인다. 이 덤불 풍경을 풍경화라고 뭉뚱그려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욕망을 품고 있는 덤불이라는 오브제를 담아낸 정물화에 가까운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덤불은 작가가 인물과 선인장을 그려 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배경의 묘사 없이 대상으로서 놓여 있다. 벨벳 지에 목탄을 정성껏 그어 보슬보슬한 감촉으로 만들어 낸 덤불과 캔버스에 긁어낸 붓 자국으로 재현된 찬란한 여름 덤불, 스산한 가을의 덤불은 풍경 속에 어우러지기 보다 여백 앞에 놓여진 하나의 욕망을 품은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듯 보인다.
거칠고 스산하며 욕망의 촉수를 간직한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광호의 덤불은 ‘어루만지다’의 동적 영역을 머리 속에 고요히 재생시킨다.
김윤경(갤러리 스케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