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다〉라는 전시의 작품 앞에 섰다. 보여지는 풍경이 시야에는 쉽게 들어오지만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뭇거려진다. 동시대의 다른 회화작가들의 전시나 작품 글을 써오면서 이번에는 처음으로 문득 그 풍경 뒤에 감춰진 ‘회화’라는 면벽(面壁)을 마주하는 순간 부딪혔다. 가장 오래되며, 거대하고 광대한, 그리고 딱딱한 미술사와 담론들을 품고 있는 이 면벽은 왜 새삼스럽게 그 풍경의 환영을 주고받는 나에게 화두로 다가온다. 그 궁금증은 이광호 작가가 10년가량 터울로 참여했던 두 개의 기획전, 즉 회화를 비평적·메타적 논리로 다가섰던 1998년 《회화술》 전시(덕원갤러리)와 2010년 《본능적으로》 전시(갤러리 소소)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개인전이 열렸던 ‘Inter-View’, ‘선인장’, ‘풍경’ 등의 시리즈 작품들이 뒤섞이며 각각으로부터 어떤 회화적 존재로서 의미를 되새겨 보지만 여전히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그 화두 속에 1990년대 후반 국내 미술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회화술》 전시와 핫 이슈였던 ‘회화는 죽었다’라는 담론이 맞물려 잠시 회자된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새로운 회화영역이 넓혀져 다시 회화가 쓰여지고 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회화작가들이 삶의 생존과 치열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그림을 그려오면서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회화란 무엇일까?’를 되새김질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 지속적으로 회화는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포용한다. 화가들은 자아와 세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형용이 덜 된 아주 작은 단위의 미시적 언어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과 서로 연결 지으며, 묵시적, 서술적, 서정적, 서사적, 모던적, 환상적, 개념적, 사실적 등등의 수많은 회화술을 보여 왔다.
회화는 이렇게 다양한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며 다각적으로 그려지거나 쓰일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고, 필자(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쉽게 정의를 내릴 수도 없으며, 어떠한 가설도 그 화면에서 미끄러진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정답이 아닌 오독과 편견을 비켜갈 수 없는 것이 회화의 속설이다. 이것에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현상과 환경에 따라, 그리고 보는 이의 심리적·인식적 변동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쓰여 질 것이며, 어떠한 편견 또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회화적 특성이기도 하다.
한편, 이광호의 작업 중 ‘본능적으로’ 전시에서 보였던 식빵을 그린 그림들이 떠오른다. 시각과 식감의 본능처럼 느껴지는 이 작품은 ‘Inter-View’, ‘선인장’, ‘풍경’ 시리즈를 작가가 진행해 오며, 다른 구조와 패턴 속에서 회화의 지층(환영, 질감, 구조)과 감각의 본능을 다시 찾으려고(잃지 않으려고) 했던 작업이 아닐까. 반면, 《회화술》’ 전시 작품 중 〈침묵의 세계〉(1998)는 질감과 환영, 내용보다는 회화의 형식과 구조에 치중한 ‘관계의 설정’에서 프레임의 반복과 중첩, 색감의 차이, 회화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서 혹은 미술 시스템의 내부에서 가장 메커니즘에 다가서기 위한 모토가 식빵그림으로 여겨지지만, 그 밑에는 회화의 본질을 모색하고 추구하려 했던 작품인 〈침묵의 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둘의 관계 속에서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보다 비주얼한 ‘Inter-View’, ‘선인장’, ‘풍경’의 시리즈로 드러냈던 것이며, 특히 그려진 식빵의 표면에 느껴지는 감성의 본능은 ‘어루만지는 풍경’과 밀착되어 있다. 거기에 사색이 더해져 보는 이의 감성을 잡아챈다.
다시 식빵 그림으로 돌아가서, 식빵의 표면을 확대하여 그린 이 그림은 지극히 평면적으로 구사되었다. 붓질도 절제되거나 감추어져 있고, 색감이나 형태도 다분히 단순하며 모던하다. 그리고 땅의 지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캔버스 올의 실체와 환영의 일체감을 드러내며, 동시에 여백의 긴장감으로 캔버스 천의 두께 1mm 정도에서 환영을 끌어낸다는 메타적 회화로써 지탱하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실체의 환영과 표면의 리얼리티를 구현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
이 그림과 풍경을 그린 〈어루만지다〉의 회화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간단히 언급한 감성의 본능이란 의미를 던졌듯이 두 그림에서는 그린다기보다는 식감과 터치의 본능을 일깨워주는 것에 의미가 더 크다. 먹고 싶고 만지고 싶은 ‘유혹을 그린다’라고나 할까. 기실 이광호는 대상이나 재료 자체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두 가지는 수단으로서 빌려질 뿐 그래서 식빵과 풍경을 그리되 그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표면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이광호 스스로가 알아채지 못한 어떤 회화영역의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직감이 든다. 그 실체는 드러내지 않고 그의 그림자처럼 이광호를 응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떤 대상의 실체와 그것을 그림으로 토해내는 캔버스 화면의 실체 사이에서 투명한 막(膜 : 얇은 꺼풀, 어루만지다)으로 인식될 뿐이며, 그 막은 수많은 레이어로 겹겹이 쌓여 이광호만의 회화적 특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광호는 그 막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감각으로서 다가가며 회화적 본질을 추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감각적인 차원에서 ‘모 작가의 회화를 삽입이라고 한다면 본인의 회화는 터치’라 하며 가벼운 정의를 내렸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여겨졌지만 계속 머리에서 맴돈다. 삽입과 터치, 그 감각의 차이는 깊이와 가벼움, 질퍽거림과 어루만짐, 섹스와 애무, 들어감과 바라봄…등등 여러 개념을 대칭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광호의 터치 감각은 그 개념의 사이에 서성이는 중간자적인 태도로 읽혀진다. 그의 그림은 가벼운 회화로, 감각적인 회화로, 기술적인 회화로 읽혀지기 쉽지만 메타적 태도의 끈을 놓지 않고 그러한 두 가지 감각의 사이에서 긍정적인 태도로 일관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의 풍경회화는 추상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왜냐하면, 그 풍경은 숲의 실체를 그렸지만 실체가 뒤로 밀려나고 그의 감정언어만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실재하는 풍경은 허공으로 던져놓고 감정의 선들을 자유로이 휘저어 어찌 보면 난장판같이 노는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거기서 빠져나와 그 풍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순간, ‘보는 이’와 ‘마주하는 풍경’은 일체감으로써 독자적인 고독한 풍경이 된다.
작가는 그 ‘풍경’을 ‘Inter-View’와 ‘선인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렸다고 했다. ‘Inter-View’는 대상이 된 사람의 모습에서 감지되는 촉감을, ‘선인장’은 스스로 내뿜고 있는 욕망과 비주얼 그 자체를 그렸다면, 풍경은 감정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하는지를 그려냈다. 또한 풍경은 앞의 두 그림에 비해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그 당시의 이미지를 6개월 혹은 1년간 삭혀놓은 후,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을 중첩시켜 그렸다.
그래서인지 그 풍경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형언할 수 없는 미세한 촉수의 언어들은 고독을 즐기는 작가의 몸체에서 빠져나오듯 보는 이의 시선을 스킨십한다. 마치 시를 노래하듯 색과 선과 명암 그리고 소리 감각이 이중 삼중으로 결합되어 이 그림에 소리공명을 일으킨다. 그림은 얇지만 시선의 움직임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고 순간 솟구치는 환영은 그림의 형식과 구조를 지배하거나 이끌기도 한다. 동시에 회화의 미적 원리를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이광호의 회화는 감성본능을 자각하는 태도로서 접근한다. 그는 다년간의 회화적 실험(자아-재료-기법-대상-관계-소통-감각)과 욕망의 본능이 소통 가능한 사회적 통념을 응시하며, 그 실험과 욕망을 회화적 시스템 속에서 통용되게끔 활용을 잘하는 작가로 거듭났다. 또한 그리는 것보다는 탁월한 터치 감각의 테크닉’을 우선시하며, 여기에 감정의 부여로 사유의 폭을 넓히고 조절함으로써 남다른 환영과 느낌을 표출해 낸 작가로 시선을 모으고 있다.
다시, 그려진 ‘풍경’을 본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적인 언어는 풍경 너머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풍경 속에는 명확성이 없고 무의식 속에서 모호한 자체의 언어들만 무성하여 명명할 수 없는, 감각만 순간 머무른다. 그 감각은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무념에 가깝다. 그래서 계속 그 풍경에 다가갈수록 언어는 미끄러지거나 사라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풍경 이면의 잔영(殘影)은 면벽 회화로 존재한다. 커다랗게 변모한 식빵의 단면이 면벽 회화로서 읽혀지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이관훈(큐레이터,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