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 표면으로서의 회화

박영택
June 1, 2010
이광호의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재현으로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는 대상, 소재를 빌어 그리는 과정에의 몰입과 그리는 방법을 되물어 보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대상과 화가와의 거리, 드라마가 배제된 그림, 아무것도 아닌 사물과 풍경, 추상적인 붓질의 구상적 드러남, 집요한 관찰과 지루한 묘사, 피부 질감에 대한 촉각적 화면의 모색 등이 묻어있다. 진동한다.
 
그는 선인장을 크게 확대해서 그렸고 또한 자연풍경을 일정한 거리에서 관조해 그렸다. 둘 다 어떤 거리감 속에서 무심하게 그려졌다. 대상의 중심으로 육박해 들어간 이 선인장과 풍경은 비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둘 다 식물성의 존재들이고 자연이다. 인물의 피부, 의복의 표면 질감 등을 집요하게 포착해 나가던 시선과 손들이 이후 자연스레 선인장의 피부로 이동했다. 모든 사물의 외피, 그 표면의 촉감을 시각화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다가 선인장이란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아주 작은 선인장의 종을 크게 확대해서 그렸다. 사진으로 촬영한 후, 관찰과 모사를 병행하면서 그렸는데 여기서 사진과 회화가 서로 조응하고 겹쳐지고 차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감각의 힘들이 발아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캔버스 표면에 다양한 기법들을 부려놓고 회화적 관능의 섬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모양과 질감의 차이에 따라 기법과 붓의 사용도 달라지며 그림의 속도 역시 다르다. 그는 선인장을 미시적으로 접근했다. 지독하고 날카롭고 단호한 관찰은 하얀 바탕에 선인장만을 독대시킨다. 그것은 분명 선인장이라고 호명할 수 있고 알 것도 같은 대상이면서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사물이 되었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다만 사전적인 학명만을 떠올릴 뿐이다. 모든 대상은 우연이고 미궁이고 난해하며불가사의하다. 회화는 이처럼 사물을 낯설고 신비스럽게 바라보는 어떤 이격의 틈을 제공해준다. 사물은 오로지 피부만을 보여준다. 회화는 알다시피 오로지 표면만 있는, 모든 대상의 피부만을 얇게 저미듯이 보여준다. 그러나 그 표면은 내부나 그 외부로 무한히 나가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또한 회화는 익히 아는,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경험적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우리는 이광호의 선인장 그림을 통해 그 선인장을 다시 본다. 다시 기억해 본다. 내가 보고 알고 있던 선인장과의 대비가, 겹침이 일어난다. 그는 선인장의 표면을 거대하게 확대해서 들이민다. 작은 선인장을 커다랗게 부풀렸다. 모든 회화는 이렇게 마술적이고 추상적이다. 선인장의 피부는 매끄럽다가 요철이 심하고 하얀 솜털 같은 가시들로 빼곡히 덮여있으며 육종 같은 덩어리들이 혹처럼 붙어있다. 이질적 존재들끼리의 접붙이기는 선인장의 특성이고 이는 모든 식물의 개방성이다. 식물은 이처럼 경계가 없다. 수직으로, 탑처럼 올라가 남근처럼 버티는 선인장의 기세는 당당한데 그 피부는 다소 징그럽고 그로테스크하다. 내장 같은 질감, 성기같이 발기된 선인장의 줄기, 악성 종양 같은 덩어리의 확산들이다. 미끌거리고 단호하고 딱딱한 선인장은 날카로운 가시와 미세한 솜털 같은 잔가시들로 뻑뻑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시각성만이 아니라 미묘한 촉각성을 안긴다. 우리는 손으로 선인장의 피부를 더듬는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잔가시와 날카로운 뾰족함이 상처를 낼 것이다. 심리적으로 은근한 공포심, 포비아를 심어주는 그림이다. 망막에 호소하기 보다는 실은 심리적으로 더 큰 자국을 남기는 그림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쉽게 명명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분명 선인장이다. 그러나 그 선인장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할 수 있나? 이야기는 부재하고 다만 선인장을 통해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운 모호한 욕망 같은 것이 떠돈다. 작가는 선인장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해소되지 못한 욕망을 질감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그림에서 내용은 없다. 무미건조하고 즉물적이고 차가운 그림이다. 오로지 선인장의 피부에 달라붙어 이야기를 배제하고 집요하게 묘사하고, 탐구하고 그려내는 어떤 기법, 방법론의 문제가 더욱 앞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를테면 하일지의 소설 같은 것이다. 그의 문체는 감정의 개입 없이 집요하게 모든 세세한 것들을 죄다 설명 하는 식이다. 그 사소한 디테일이 전부다. 말랑거리는 감정이나 상투적인 느낌, 거대담론이나 드라마, 거창한 주제나 이념 같은 것을 사소함으로 덮어버린다. 집요함으로 메워버린다. 거기에는 오로지 보는 이의 절대적인 어떤 거리감이 자리한다. 이광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그런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광호의 그간의 작업은 사실 어떤 '거리'라는 개념이 무척 중요했다고 보여진다. 그림은 특정 대상과의 거리 속에서, 시선의 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그 거리, 시선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게 이광호는 대상을 보는 자신만이 은밀하고 모호한 그런 시선의 거리를 보여왔는데 그것은 어딘지 스산하고 애틋한, 아련함과 서러운 시선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집착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로 돌아서다
무의미를 대신하는 집요한 그리기, 묘사는 일종의 권태로움이기도 하다. 그는 그렇게 다소 무감하게, 서늘하게 대상에 육박한다. 작가와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 속에서 피부에 달라붙어 기생해 나가듯이 균사처럼 퍼지듯이 그린다. 그는 사물의 피부를 애무한다. 관능적으로 피부만을 편애한다. 모든 생명체의 피부는 그런 생명활동이 소산으로 생긴 주름의 겹침과 늘어짐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식물의 일부를 확대해 그린 그림은 빈번한데 상식적으로 오키프의 꽃 그림이 떠오르겠지만 나로서는 김홍주의 꽃잎이 연상된다. 세필로 촘촘히 캔버스 올 안으로 착색해 들어가 수를 놓듯이 오밀조밀 그려나간 자욱이 어느새 꽃잎이나 꽃이 성기를 능청스럽게 보여주는 그런 그림,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세부에 집착해서 보다 보면 꽃을 잃고 상실하고 망각하고 다시 일정한 거리에서 꽃잎임이 드러나는 그런 그림이다. 그러나 이광호는 대번에 그것이 선인장임을 숨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게 증거한다. 그런데 그 증거는 선인장이란 존재의 과시가 아니라 실은 우리가 몰입해 보아도 전혀 알 수 없는 피부의 질감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어딘지 불편하다. 알려고 가까이 간다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풍경 그림 역시 시각적으로 무척이나 지루하다. 그러나 그리는 시스템은 선인장과 다소 다르다. 빠르게, 덧없이 스쳐 가는 시선의 경과를 예민하게 보여준다. 선인장이 한없이 더디고 느린 듯하다면 풍경은 시간의 개입이 결정적이다. 직접 장소를 방문한 뒤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서 그렸다고 한다. 이 풍경은 한국의 자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근한, 아무것도 아닌 풍경들이다. 동시에 빛과 공기의 분위기에 의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는 그 풍경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이전의 일반적인 풍경화가 보여주는 것과는 무관해 보인다. 아름답거나 자연스럽다거나 숭고하다거나 하는 풍경은 아니다. 그는 이른바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을 만났을 때 그것을 소재로 해서 그렸다. 사실 정념은 모든 대상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무척이나 개인적인 문제이자 신비주의적이고 주술적 차원이기도 하다.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은 모호한 자신의 욕망을 대신 암시하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그 풍경은 우연히 발견된다.

덧없는 바람이 불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관자의 시선이 있고 흐느끼는 풀들이 있다. 시선은 불쑥 풍경 안으로 들어갔다. 추상적인 붓놀림이 운율처럼 흐르고 감성적인 붓질이 춤춘다. 선인장에 비해 이 풍경은 무척 자유롭고 개인적이다. 한결같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장소, 지루하고 건조한 풍경인데 몽환적인 색조, 희뿌연 한 느낌이다. 작가는 다양한 풀과 나무의 피부를 애무한다. 마치 잔가시로 가득 덮여있던 선인장의 어느 한 부위가 확 펼쳐져서 풍경으로 나앉은 것 같다. 이 그림 역시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그린다는 방법론, 그리기 자체, 붓질을 적극 모색하는 편이다. 풍경화에 밀착해서 들여다보면 온통 추상적인 붓질들이 선회, 난무를 만날 것이다. 가까이에서는 추상이고 일정한 거리에서는 극사실적인 그림이다. 사실 모든 그림이 그렇게 붙어서 보면 물질이고 뒤로 나가면 이미지이긴 하지만 구상과 추상을 의도적으로 뒤섞고 그 둘 사이의 경계를 시간과 거리,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유희하는 작업들이 최근 두드러진다.
이광호의 근작에서는 가능한 언어와 개념을 빼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붓질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촉각적인 이 그림은 작가의 몸이 느끼는 사물의 피부 질감, 그 감각을 붓질을 통해 온전히 전달하려는 데 있어 보인다. 촉각적인 회화!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외부 세계/대상과 작가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작가는 육체를 통해 주어진 외부 세계를 보고 느낀다. 이를 화면에 옮기는 것이 그림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조건, 신체적 조건이 개입된다. 우리들의 몸은 운동하면서 지각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뇌로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감각에 기인한다. 새삼 그의 회화는 오늘날 급변하는 문화환경 속에서 회화의 향방과 화가의 위상을 질문하고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그림, 일종의 ‘메타–그림’의 성격을 띄고 진행한다. 오늘날 회화는 개념적인 것과 지각적인 것이 직접 마주치는 장이자 신체–자연의 비개념적인 운동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운동을 지속해 나간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회화의 본질은 한때 모더니즘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단순히 평면성이라든가 형상성, 색채, 개념성 등의 어느 한 측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마주치고 겹쳐지는 형국 속에서 형성되는 특이점들의 역사적 변환에 따라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본성은 다중성과 복수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 관계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광호의 회화도 그 어느 지점에 위치하면서 강한 파장을 만들어 낸다.

 

박영택 (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월간미술』(201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