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이른바 추상예술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실루엣과 자세를 다시 창조하면서 풍경–얼굴의 조직화 속에서 이미 충분히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
이광호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리는 인물화나 풍경화는 사실성을 뛰어넘어 회화적 기법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재현방식을 보여준다. 초기의 다소 팝아트적인 유화들에서 르네상스 회화를 연상시키는 원근법을 사용한 서사적 회화를 거쳐 다소 초현실주의적인 레이어들의 병치를 이용한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이광호의 회화가 보여준 다양한 편력들을 기억한다면 그가 다루는 회화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폭넓은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이광호가 주로 다루어온 인물화와 풍경화의 주제들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현재 그가 다루고 있는 정물화가 다소 의외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근까지 몇 년 동안 이광호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100명의 모델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인터–뷰’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재현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포착하고 서술하는 과정을 회화뿐 아니라 동영상, 오브제 등과 더불어 입체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즉 모델을 회화로만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비–회화적 경로들, 즉 모델과의 대화, 그를 통해 얻게 된 대상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구체적 사물의 아우라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회화의 핵심적 이슈들에 대해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탐색하였다.
그가 고려하는 회화의 핵심적 이슈란 무엇일까? 회화적 재현은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다. 하나는 대상의 재현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다. 대상은 회화적 재현만이 고유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회화적 공간 속에서 마치 신화 속의 존재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단 회화적 공간 속에서 재현된 대상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있어 동일한 기억의 맥락 속에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회화는 기억의 장치, 즉 기록장치이면서 동시에 대상을 역사화, 신화화하는 장치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회화적 재현에서 발견하는 것은 끊임없이 현재를 불특정한 과거, 정의되지 않은 신화적 순간과의 관계로 환원하는 반성적(reflective) 메커니즘이다. 다른 하나는, 핵심적 이슈가 회화적 재현이 아닌 회화적 시선의 재현인 경우이다. 대상을 재현하는 과정 대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에게서 새롭게 형성되는 시선의 형식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것을 ‘시선의 생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회화적 재현은 더 이상 대상의 정체성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어떻게 하나의 ‘체제’(system)의 일부로 구축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나아간다.
최근에 이광호가 그리는 대상은 ‘선인장’이다. 왜 하필 선인장일까? 이 이상하게 생긴 식물을 그리면서 작가가 이전의 작품들로부터 이어가고 있는 관심사는 무엇인가? 먼저 선인장에 대해 알아보자. 캑테이시아(Cactaceae)라는 학명을 지닌 선인장은 중남미, 특히 멕시코의 사막 지역을 중심으로 서식하는 식물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선인장은 5천만 년 전 아메리카 대륙이 아프리카와 분리된 이후 약 3–4천만 년 전부터 나타나 진화를 시작했으며, 그 때문에 오직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서식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토퍼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15세기에 처음으로 선인장을 유럽에 가져갔을 때까지 립살리스 바키페라(Rhipsalis baccifera) 라는 이름을 지닌 단 한 종류의 선인장 종자만이 조류의 이동에 의해 다른 대륙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대륙 탐험 이후 선인장은 급속하게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으며 지금은 식용, 관상, 약물, 사료 등의 다양한 용도로 재배되거나 상당히 많은 종류가 희귀식물로 보존되고 있다. 선인장은 극심한 건조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인 만큼 최대한 수분을 보존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했다. 그 결과 이 식물은 아주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줄기는 직사광선으로부터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 최대한 평면을 줄인 둥근 단면을 지니고 있으며 매끈한 각질로 덮여있다. 잎사귀 역시 평면을 최대한 없애는 동시에 수분을 얻으려 하는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시 모양의 잎사귀가 광합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녹색의 줄기가 대신한다. 그래서 수많은 가시들로 뒤덮인 녹색의 기다란 줄기는 마치 혼자 서있는 기둥처럼 보인다. 이광호가 그리는 선인장들은 사실은 아주 작은 선인장의 종을 크게 확대해서 그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형 선인장들의 기본적인 형태는 그보다 훨씬 큰 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들 각각이 보여주는 성격은 마치 이미 성공적으로 구상을 끝낸 연극의 배역들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어떤 것은 굵고 강인한, 기념비처럼 보이는 줄기를 뽐내면서 예리하고 위협적인 가시들로 둘러쳐져 있으며, 마찬가지로 숱한 작은 가시들을 지닌 어떤 것은 통통하고 귀여운 둥근 줄기 위에 강렬한 원색의 꽃봉오리를 얹고 시선을 유혹하고 있다. 또 다른 것은 길고 흐드러진 줄기들을 부드럽고 긴 가시들이 휘감고 있다. 각각의 선인장은 줄기, 가시 그리고 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줄기의 녹색과 가시의 무채색에 가까운 농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광호의 그림 속에서 이것들은 눈부신 흰색의 배경 앞에서 마치 절대적인 공간 속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인터–뷰’ 프로젝트와 ‘선인장’ 프로젝트는 사실 동일한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인물들을 그리면서 그들의 존재가 회화적 구조 안에서 어떻게 ‘동일성’과 ‘차이’를 만들어 가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회화적 재현이 무엇을 구축하고 또 무엇을 변형시키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회화적 재현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의 모방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적 재현은 인류가 지속해 온 가장 오래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분명 회화적 재현은 대상을 모방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벤야민이 비판한 회화적 아우라의 생산을 위한 것으로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회화는 그보다 좀 더 야심찬 것, 보다 원대한 계획의 일부로서 고려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별성’(individuality)의 발전적 역사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만한 것으로, 최종적인 단계의 ‘개인’으로서의 예술가가 제시하는 세계와 인간의 비전에 대한 것이다. 회화적 재현은 회화적 구조, 다시 말해 한 개인만이 경영할 수 있는 생산적 구조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사진 혹은 동영상과 달리 드로잉과 회화는 독자적인 작가의 신체가 기계적 틀로 작동한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인 표현수단이며 다른 기계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생물학적 생산방식이다. 그 틀 안에서 회화적 재현은 경험과 반복, 훈련을 통해 상이한 경로들을 따라 대상의 재현에 이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물론 대상의 회화적 재현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평균적인 목표이자, 대부분의 개인들이 훈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회화적 재현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이자 수단에 머문다. 그렇지만 동시에 회화적 재현은 그 자체로서 고립된 신체의 언어, 개별성의 증거, 즉 ‘서명’으로서의 닫힌 체제이기도 하다. 회화적 재현은 그것을 구사하는 ‘개인’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개별적 계’(個別的 界, individual sphere)에 따라 매번 다르게 구현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개인이 세계를 자신의 ‘개별적 언어’ 안에서 생산해 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한 사람의 ‘탁월한 개인’, 즉 예술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이광호가 수많은 사람들을 동일한 경로에 따라 회화적으로 재현하고자 할 때, 그의 문제는 바로 회화적 재현 그 자체가 아닌 세계를 하나의 개별적 계를 통해 제시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인물화에서 다룬 그것은 이제 선인장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이광호가 선인장을 그리는 방식은 인물화와 동일하다. 작은 선인장을 관찰하고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한 뒤, 관찰과 모사를 병행하면서 그리는 것이다. 회화적 개입은 주로 캔버스에 대상의 특질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벌어진다. 때로는 나이프로 긁어내기도 하고, 최소한의 물감을 사용하여 질감을 나타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표면을 문지르기도 하면서 캔버스에 묻은 아주 작은 물감의 상태들로부터 회화적 관능의 섬세한 차이들을 만들어낸다.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기술적 완벽함이 바로 그를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이자 회화의 마스터로 인정하게 하는 이유이다. 화가와 모델 사이에 가로 놓인 ‘관능적’ 관계는 선인장에서도 발견되는데, 작은 선인장들은 거대하게 확대되면서 ‘선정적’이거나 심지어 ‘동물적’인 분위기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때론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대한 기념비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선인장 특유의 남근적(男根的)인 아우라를 자아낸다. 흰색의 추상적 공간 속에 마치 수집된 표본들처럼 동일한 크기의 화면으로 정렬되어 있던 인물화들과 이 선인장 그림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후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캔버스들 속에서 훨씬 독자적인 공간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인장들은 인물들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하고 강렬하다. 이것들은 마치 인물화의 모델들이 감추고 있었던 내면의 어떤 감정들이 폭발한 단단한 표면을 지닌 구름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떤 선인장은 버섯구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동물적으로까지 느껴질 만큼 육감적인 이 거대한 식물의 이미지들은 마치 대상의 내면을 파고들고자 하는 화가의 시선에 담긴 욕망에 비례하여 대상 스스로 새롭게 더욱 강렬한 시선을 소구(訴求)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각각의 선인장 그림은 ‘선인장’ 프로젝트 전체의 일부이자 그 전체의 구조를 함축하고 얼개 혹은 입구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의 인물화가 인물화 프로젝트 전체의 동일성과 구조를 함축하고 있듯이 하나하나의 선인장 그림 역시 전체의 메커니즘을 담고 있다.
풍경화에서는 인물화나 선인장 그림에서와 달리, 동일성을 회화적으로 하나의 개별적 계 안에서 재현하려는 노력 대신 다른 어떤 것이 화가의 관심을 끌고 있다. 대상은 화가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나 선인장과 같은 특정한 계열(series)이 아닌 자연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빈 공간들이다. 어쩌면 풍경 역시 일종의 대상적 계열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 풍경들은 너무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혹은 ‘덧없는’ 시선의 경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숲과 주변의 수풀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바람의 움직임 등이 있다. 작가는 이 장소들을 직접 방문한 뒤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 풍경들은 한국의 자연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소들이지만, 마찬가지로 매번 빛과 공기의 분위기에 의해 다른 양상을 띠는 장소들이기도 하다. 대상들은 일상적으로 그 주변을 거니는 인물이나 산행을 나온 등산객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의 기억에 일반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흔하디흔한 자연의 외양은 마치 그것에 대해 과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못한 일반인의 서정적 시선, 멀리서 혹은 우연히 바라본 듯한 중립적 시선을 떠올린다. 어떤 특별한 파토스도 이 풍경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광호에게 있어 이 풍경들을 일종의 ‘여백’과 같은 것이다. 작가에게 이 풍경들의 의미를 질문했을 때 그가 보인 태도는 모호함이었다. 다시 말해, 풍경은 ‘여가’이자 ‘잉여’이며 일종의 ‘바캉스’ 같은 것이다. 사실상 여기에는 대상이 없다. 그가 그토록 열렬하게 탐구해 온 회화적 재현의 문제 역시 구체적 대상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가 재현하는 것은 오랜 풍경회화의 주제인 빛과 공기 그리고 배경으로서의 장소들이다. 이것이 일종의 여유, 혹은 한가함을 화면에 부여한다. 마치 인물화나 선인장 그림에서 삭제된 배경만을 따로 그리고자 하는 욕망이 이 풍경화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나 한 것처럼.
모든 회화는 추상성을 생산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시선(vision)의 생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가가 그것을 의식하는 정도에 따라 회화적 재현은 단지 대상의 묘사에 머물거나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예상치 못한 추상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회화의 추상성은 그린버그의 경우처럼 회화의 환원적 조건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대부분의 ‘추상회화’에서처럼 추상적 기표들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회화의 추상성이란 그림이 제시하는 조건들이 아닌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성의 생산에 대한 예시로서 마그리트와 피카비아의 회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회화에서 구사한 개념적, 시각적 항(項)들의 조합(combination)은 추상성을 가장 빠르게 생산하는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회화 안에서 발견되는 대립하는 항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광호의 경우 회화적 추상성은 화가가 선택하는 일상적인 대상 (인물, 선인장, 풍경)과 그것의 계열화 사이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되지만, 그것은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화, 정물화 혹은 풍경화의 범주와의 아주 섬세한 차이에 의해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띠게 된다. 이광호의 경우, 인물화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에서 그것의 상태를 기록한 정물화에 가까우며, 정물화는 대상의 캐릭터를 궁극적으로 강조한 인물화를 대체하고, 풍경화는 끝내 그려지지 않을 배경(setting)의 일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이 그림들을 지배하는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사실적 재현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회화적 일루젼조차 하나의 항으로 고려하게 한다. 회화는 시선에 무대(setting)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관능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두뇌의 회백질(灰白質)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광호의 그림을 보는 것은 개개의 화면이 뿜어내는 시각적 도전을 마주하는 것임과 동시에 전체의 배열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노동자에 가까운 화가가 전개하는 회화적 모험의 도입부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끝없이 반복하여 제기하는 문제, 즉 회화라는 이슈에 대해 그와 더불어 사유하고 경험을 나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선인장의 존재감, 그것이 장악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확고함,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관점의 선명함과도 같은 것을 본다. 결국 선인장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과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유진상 (미술비평)
《Touch》(2010, 국제갤러리)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