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듯, 그리다 — 사람을 그리는 화가 이광호

이후
January 1, 2007
1967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창동 미술창작스튜디오 4기 입주 작가 당시 작업의 결과를 2006년 《Inter-View in Changdong》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이어 뉴욕 아모리쇼(Armory Show)와 베이징 차이나 인터내셔널 갤러리 엑스포지션(China International Gallery Exposition)에 참여, 같은 해 중앙미술대전에서 우수상과 인기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제3회 카스텔로 국제회화 공모전(the 3rd International Painting Prize of the Castellon County Council)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국민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인터뷰는 아무래도 어렵다. 인터뷰어가 좋으면 좋은 대로 설레고,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헤매기 일쑤다. 하물며 사람을 그리는 화가임이랴. 사실적인 인물화를 그리는 흔치 않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에다 사람을 많이 그려 척, 보면 다 알 것 같은 거리낌이 앞섰다.
물어물어 도착한 작업실은, 사람 좋아하는 중년의 사내가 열어둔 복덕방 같은 인상이었다. 공인중개사니, 부동산이니 하는 세련된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목적 없이 들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혹은 아무나 와서 커피를 타 마셔도 뭐라 할 사람 없는 곳. 화실이 이렇게 소탈하다는 것은 그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닐까.
 
인물 선정은 어떻게 하시나요? 
대부분 주변 사람들 중에서 결정해요. 낯선 사람은 그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어서 선택한 인물이니, 모델료 같은 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라고 하면 화가가 의뢰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제 모델들은 자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제 앞에서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웃음)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볼수록 재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배경과 똑같은 의자지만 각기 다른 포즈로 앉아 있는 것이, 저마다의 개성이 엿보여서 그럴까요? 
손 모으는 자세도 제각각 다르네요. 그저 편하게 앉아 있으라고만 하는데, 참 신기하죠. 포즈뿐 아니라 옷의 주름 형태도 전부 달라요.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들은 주름이 더 자잘한 식이죠. 저는 그런 눈에 민감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편입니다. 때문에 그림에서도 실제와는 달리 어떤 요소가 강조되거나 생략되죠. 사실과 다르게 변형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개성, 혹은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인상에 따라 그리는 방식이 달라지는 건가요?
 제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촉감에 의한 것이라서 그런지, 다른 건 몰라도 질감만은 확실히 기억하거든요. 질감의 기억이 다른 만큼 사람마다 붓이 다르고, 붓질이 다르죠. 저는 덧칠도 하지 않고 물감 두께도 얇습니다. 대부분 한 번에 그리는 편이에요. 말하자면 붓질은 나의 노하우죠. 아마도 상대방을 만지듯 그리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평소 눈여겨봐 온 사람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 부러운 방식입니다. 창동 스튜디오에서 작업하시는 걸 보면 이들과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림을 완성하시던데, 그런 작업이 그림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모델이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사진을 보고 그립니다. 당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확인이 안 되니까요. 변화무쌍한 표정과 목소리가 없으니 답답하죠. 정확히 말하면 인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그리는 거예요. 인터뷰는 그 기억을 풍부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한마디로 나와 친해지는 시간인 거죠. 친해져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훨씬 강한 기억이 생기니까요. 
 
모델이 1백여 명에 이르는데, 그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웬만한 드라마보다 재미있겠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렇죠. 스튜디오 근처에 청국장 맛있게 하는 집이 있었어요. 그 집 주인도 모델 중 하나였는데, 그분이 영화배우 일도 하셨거든요. 제가 작업하는 동안 세 가지 배역을 맡게 해서 그때마다 그려봤어요. 누군가와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제 모델을 하면서 극복하고 싶다고 자원한 사람도 있었고요. 제자 중 하나는 제가 그림 그릴 동안, 본인도 내내 저를 그려요. 그 아이와는 몇 년간 쭉 그렇게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다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라 그리는 저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어요. 창동 스튜디오 보일러실 수리하시는 분이랑 수위 아저씨, 청소해 주시던 아주머니, 제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의 학부모님도 계시고…. 전시 보러 갔다가 예쁜 여자를 발견해서 그렸는데, 사심이 들어가니 너무 예쁘게 그려져서 다시 그리기도 했어요. (웃음) 같이 일했던 작가들, 그들의 남편이나 애인, 제 방에 우연히 놀러 온 외국인 수사님, 후배들, 제자들, 딸 윤서와 아내, 또 우리 부모님과 장모님…. 
 
모델과의 거리가 전부 일정한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모델한테 빠지고, 반대로 너무 멀면 접근이 힘들죠. 옛날 사람들이 그랬어요. 인물화를 그리는 데는 180cm가 좋다고. 
 
친해지기 위해서는 일종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관계에 무척 능숙한 사람처럼 들립니다.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더 심했어요. 내성적이고, 상대방을 정면으로 보지도 못하고, 여자애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말도 잘 못했죠.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많이 좋아졌죠. 라면도 끓여 먹고, 공도 차고 하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미술반 활동을 했거든요. 사람마다 욕망이 있잖아요. 그 때문에 사람을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욕망은 슬픔과 아픔에서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제가 그리는 인물들은 그림 속에서조차 전부 다른 쪽을 보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처음 그린 그림이 서로 바라보는 그림이었지요. 전시 오픈 때도 그렇고, 웬만한 모임에는 잘 안 가지만 또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화실에 아내가 있고 딸아이가 놀러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인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체로 맞는 말이긴 한데…, 다 똑같아서 좀 색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난 국제 갤러리에서의 전시에 부쳐 유진상 평론가가 ‘에로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표현이 나를 좀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화가가 모델에 대해 갖는 에로틱한 관계는 바로 긴장된 시선이 지속된 시간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것이죠. 그런데 제 그림은 그려지는 사람이나 그리는 사람이나 솔직하게 다 드러나니까요.

글 : 이후 기자

사진 : 김용철

 『Hana Bank』(2007 Spring, pp.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