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에게 있어서 회화의 매체인 캔버스는 작가가 대상과 나누는 대화의 장이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그리는 최근의 인물화 연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직업적인 모델을 쓰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관심을 끈 인물을, 그것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눈여겨봐 온 사람들을 섭외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것이 최근에 그가 시도하는 방식이다. 먼저 선택한 인물을 의자에 앉힌 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다시 얼마 동안의 시차를 두고 이번에는 직접 모델과 대화를 나누며 그림을 완성한다. 이 광경은 서로 다른 각도로 설치된 두 대의 비디오 캠코더에 의해 녹화된다.
이광호의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장에서 관객들은 다양한 직업의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작가, 주부, 수사, 학생, 큐레이터, 평론가, 노동자 등등 인종이나 성별, 직업, 연령, 계층에 관계없이 선택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이 담긴 인물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모델에서 우러나오는 특유의 향취를 맡게 될 것이다. 25호 P형(80.3×60.6cm)의 캔버스에 담긴 반신상의 인물화들은 다 같이 철제의자에 앉은 인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연작의 표제를 ‘창동에서의 인터뷰(Inter-View in Changdong)’라고 붙이고 있는데, 이는 작가와 모델과의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이 연작의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인터뷰 녹화 장면은 추후에 편집되어 비디오 영상으로 상영된다. 또한 벽에는 모델과 연관이 있는 소품들이 부착된다. 즉, 실제의 사물과 그려진 이미지, 그리고 모델의 생생한 육성과 함께 재생된 연속적인 동작의 인물 이미지를 보면서 관객들은 이광호라는 작가가 벌이는 인물화에 대한 새로운 실험의 강한 의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광호의 인물화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묘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가능한 한 대상이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다. 그는 피부와 옷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드러나도록 거기에 맞는 필치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유화의 필법에 관한 다년간의 수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소 엄숙해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관객들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 삶의 궤적을 캔버스에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하면서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윤색을 가하는 자세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무작위적인 선택이나 직업적인 모델을 쓰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나 상당 기간 동안 관찰해 온 인물을 섭외하여 모델로 쓰고 있는데, 이는 대상에게서 느끼는 특유의 향취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광호의 이번 실험은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파악할 때 회화와 영상, 오브제 등 동시대 미술의 주류를 이루는 삼자 간의 제휴가 될 것 같다. 물론 회화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동영상으로 펼쳐지는 비디오 작업과 오브제의 제시가 지닌 의미도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 요소가 통합을 이루어 한 장에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작가의 이러한 의욕적인 실험이 우리의 미술계에서 맨 처음으로 행해진다는 사실에도 있지만, 그가 시도하는 이 융합(fusion)의 방식이 매우 논쟁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업의 중심은 여전히 회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디오나 오브제가 단순히 회화에 기생하는 부차적인 요소로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이 논쟁적인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이번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 비디오에 담아 편집, 방영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그 성격상 일련의 연속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광호는 작업의 초기에 회화에 있어서 재현(representation)과 시선의 문제에 몰입해 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바로 〈동물원〉(1996)인데,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의 〈시녀들〉(Las Meninas, 1656)에 반영되고 있는 것처럼, 그림 밖에서 화면을 응시하는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물론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에서 그림 속의 거울에 나타난 왕과 왕비의 위치가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위치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이광호의 경우 그림의 왼쪽 하단부에 있는 여자를 찍는 오른쪽 상단부의 카메라를 든 여자의 시선(도판 참조)과 캔버스 바깥에서 왼쪽 하단부의 여자를 바라보는 작가/관객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즉, 카메라를 든 여자의 시선이 그림의 왼쪽 여자를 향하고 있고, 같은 여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존재가 카메라를 든 여자의 시선에 의해 감시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의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갓 마무리되었을 때만 해도 화면 우측 상단에 위치한 카메라의 시선은 좌측 하단의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나의 심리와 시선에 대해 일견 냉정한 타자의 응시로서 작용했었다. 그래서 내심을 들키기라도 한 듯 황급히 화면 이곳저곳의 인물과 대상들로 시선을 옮기게끔 만드는 타자의 역할을 그 카메라의 시선이 수반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어쩌면 이것은 욕망의 눈에 대응하는 타자의 감시의 관계였다.” (이광호의 작업노트 중에서)
그러나 그는 이내 카메라의 눈이 타자의 눈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하는 자로서의 또 다른 자신의 시선임을 깨닫게 된다. 이 시선의 문제는 그 이후의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게 되는데, 거울 속에 나타난 작가의 모습과 맞잡은 손을 통하여 화면 안과 밖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연장의 문제를 다룬 〈침묵의 세계〉(1998)를 비롯하여 〈푸른 커텐, 태국치마 그리고 혜련〉(2001)에 나타난 넓게 벌린 발의 모습 등이 그것들이다.
이광호의 작업에 있어서 작가적 시선의 발원지, 곧 작가의 신체가 위치하는 곳은 캔버스의 앞이다. 또한 그곳은 전시장에서 관객이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객은 그림의 앞에 서서 천천히 그림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바짝 다가가거나 전체를 감상하기 위하여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할 것이다.
이광호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관객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다. 관객이란 단순히 작가에 의해 주어진 작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의 최종적인 해석자라고 하는 사실에 주목했다. 영상 작업과 오브제 작업의 병행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관객에게 베푸는 친절한 선물이다. 인터뷰를 통하여 모델의 감추어진 내면적 정보를 알려주거나 손때 묻은 사물(오브제)을 제시하여 존재의 생생한 결을 느끼게 하는 일 등은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다. 아직 디지털 아트의 특징인 상호작용적인(interactive), 그래서 관객참여적인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회화를 중심으로 영상, 오브제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하여 회화의 제작과 감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광호의 실험은 미술계의 큰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교수)
《Inter-view in Changdong》(2006,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