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인적인 토로(吐露)에 다름없는 사연들이 이미지와 불가분의 짝을 이루는 이광호의 그림은 그것의 필연적인 서술성과 이미지 자체의 호소력 사이에서 유영한다. 그가 사용하는 시각언어는 기본적인 조형요소들이 전하는 극히 시각적인 환기력과 함께, 분명 알레고리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의 문화적 관습과 일상의 경험 내에서라면 충분히 그 의미가 짐작될 법한 범상한 상징성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광호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가 구사해 낸 조형의 면면을 감상함과 동시에 그가 애써 담아 놓은 이야기를 부담 없이 '읽는' 일에 해당한다. 그러한 감상법은 이를테면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의 유럽인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나 베르메르(Jan Vermeer)의 상징 가득한 작품들을 흥미롭게 들여다 보는 행위와 유사하다. (현재의 우리로서는 오랜 상징물들의 시대적 개연성과 정형화된 내용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겠지만, 당대의 감상자들이 그림 속의 약호화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 지금처럼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생각하긴 힘들다) 물론, 우메다 가즈호(梅田一穗)의 지적처럼, "대상의 근대적인 표현에 익숙한 우리는 사실적인 외관 뒤의 상징적인 의미를 간과"하는 일이 잦다 보니, 이러한 그림감상은 더러 지난(至難)한 방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광호의 그림처럼 상징물이 내포하려는 의미와 더불어 그것이 구성해 내는 주제가 도상학(iconography)적인 질서와 엄밀함과는 요원하고, 또한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으려는 듯한 의도적인 애매함이 작품의 주요한 특징으로 간주한다면, 함축된 상징을 음미하고 상상하며 임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감상은 나름의 독특한 즐거움을 지닌다. 암시와 은유를 유연하게 읽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여러 추측과 오해 역시 작가와 감상자 모두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 못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추측과 오해는 작가가 기대하는 '텍스트'로서의 혹은 '명확한 의미의 유예'로서의 그림읽기에 한 발 더 다가선 감상법이기 쉽다. 설령 이광호의 그림들이 언어적이고 서술적인 특징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림을 보는 일이 추리소설의 꽉 짜여진 경로를 앞뒤로 추적하고 조각그림(puzzle)을 빈틈없이 맞추는 일과 다르다는 걸 새삼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2
마음에 품어 두었던 각별한 기억과 경험들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은 이광호의 경우, 자기성찰의 욕구와 관련이 있다. 그와 같은 작업에 관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타자의 입장으로 대상화"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끝없이 객관화하여 반성하는 주체가 되고자"함이었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지난 몇 년간 그가 대상을 '보고 있는 자신이 보여진다'라는 점에 집착하고, 시선의 방향성과 능동성 등을 문제 삼던 고심의 근간에는 스스로를 거듭 되돌아 보려는 그의 습성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광호가 자신의 소소한 체험과 일상의 편린을 꾸준히 그려 오는 까닭의 한편에는 "그림을 삶과 밀착"시키고 싶다는, 그 또한 소박하며 진정어린 심경이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무언가 거창하고 원대한 주제를 표현한다는 것은 소화하기도 힘들뿐더러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믿음이, 그를 계속해서 일상과 주변에 눈을 돌리도록 만들고 또 꾸밈없이 기록하게 한다는 진술에 다름아니다.
그런 연유로 작가 본인을 포함해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정황은 이광호의 내면 풍경과 개인사를 솔직하게 반영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수태고지(受胎告知)〉(1440–1445)를 인용한 〈머리깎기〉(2001)와 같은 그림을 통해서 화면의 우측 하단에 그려진 여성(그의 아내, 혜련)이 아기를 갖길 바라거나, 곧 임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얻을 수 있다. 인용한 원작의 제목과 내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그림을 한 번 보기로 하자. 이발 중인 남자(작가)의 옆모습이 만들어 내는 방향성과 원근법에 의해 점감(漸減)된 기둥의 배열을 따라가다 보면, 훌라후프를 돌리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화집에 인쇄된 〈수태고지〉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데, 아내 뒷편의 기둥 위에서 (안젤리코의 원작과는 다르게 그 위치를 옮긴) 비둘기 조각이 그녀를 향하고 있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들에서 보통 비둘기가 성령(聖靈)의 상징을 뜻한다는 걸 모를 경우라도, 비둘기의 배치는 곧 그녀에게 기쁜 소식이 있겠구나 싶은 암시를 전한다. 또한 소녀의 등 뒤 먼 곳으로부터 언덕을 따라 휘어져 내려와, 왼편 아래로 흐르는 그림 상의 길 끝에는 매우 의도적으로 넣은 것으로 여겨지는 어린 잎새가 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남자의 심리는 무엇일까? 작가의 지척에 위치하는 사물들을 다시 살펴보자. 강한 색상으로 인해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붉은 커튼은 안젤리코의 작품에선 침실을 가리는 역할을 했었다. 또한 얀 반 에이크의 저 유명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Portret van Giovanni Arnolfini en zijn vrouw, 1434)이란 그림에서도 그것은 침대를 가릴 유사한 쓰임새로 묘사되어 있다. 혹여 붉은 커튼과 침실을 이웃해서 배치한 작품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커튼의 붉은 색감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쓰인 듯한 모양새에서, 바로 곁의 실내가 은밀하고 극히 사적인 공간임을 눈치채는 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국면은 작가가 그 실내를 침실이 아닌 묘한 공간으로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머리칼을 자르고 있으므로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샤워기 딸린 세면대와 눕기 편한 의자 등속을 그려 넣었겠지만, 붉은 커튼과 그렇게 생긴 세면시설의 어른어른한 표현은 그림 속의 남자가 뭔가 엉뚱한 잡념에 빠져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어수선하게 무성한 잡풀은 그의 심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그림들 속에서 남자는, 이 작품과 대비되게도, 푸른 커튼의 실내에서 그의 아내와 대면(〈푸른 커튼, 태국치마 그리고 혜련〉)하고 있고, 옆의 인물에게 등을 돌리고 새싹을 관찰하는가 하면(〈인엽이 형과 나〉), 아내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얹고 있다(〈두 손〉).
# 3
휘슬러(James A. M. Whistler)의 〈회색과 검정색의 구성,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Arrangement in Gray and Black No. 1 : Portrait of the Artist's Mother, 1871)을 은연중 연상시키는 〈그림보는 혜련〉(2001)은 임신한 여성(아내)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작품의 주제와 정서면에서 이 그림은 이광호의 다른 작업들과 사뭇 다른 인상을 전달한다. 무척이나 포근한 느낌을 주는 소파에 길게 앉아서는, 제목 그대로 그림을 완상하는 아내의 정경을 묘사한 이 그림은 다기한 상징물들을 생략하고 차분한 색감과 간명한 화면구성으로 그려짐으로써, 무엇보다도 편안하고 해사한 '정서'를 전한다. 방금 전까지도 읽고 있었을 책을 한켠으로 물리고 볼록한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그림을 바라보는 여성의 표정이 더없이 여유롭고 안정되어 보인다. 포갠 발 아래로 떨군 샌들마저도 이 평화롭고 느린 정감에 일조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녀의 배경으로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가 널따란 여백처럼 세워져 있다.
'99년의 한 인터뷰에서 이광호는 자신의 그림에서 중요한 면은 "아주 작고 은밀한 얘기를 들었을 때의 그런 느낌 같은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육성을 다시금 빌자면, 그 느낌은 "미묘한 심리적 동요"와 같은 것이고 "모호한 감정"이자 "아주 작은 부분"이다.
그런데 그림을 통해 전해지길 바라는 그 섬세한 느낌은 실상 언어 이상의 것이거나, 언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리라. 이미지는 필경 언어와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의미와 환기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광호가 자기고백적인 그림을 그려 내려고 하기에 언어적인 서술성을 동반할지언정, 이미지의 이 본질적인 생리는 끝까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와 그림이 도달해야 할 곳은 지금까지 그가 견지한 상징과 성찰을 담지(擔持)하는 지점 이상의 영역일 것이다. 〈그림보는 혜련〉이 다른 정서를 전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광호가 이제 막 들어선, 이미지 본래의 풍부한 의미체계를 이 그림은 길어 올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림 속의 텅 빈 캔버스가 이미지 자체의 공간을 은유하는 여백마냥 은근하게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황재연
《Lee-Kwang_Ho》(2001, 인데코 갤러리) 도록
* 필자 황재연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호서대 예술학부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