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友와의 대화 2

황재연
July 1, 1998
1. 시각적 요소들
황재연 : 이미 완성되었거나, 마무리를 눈 앞에 둔 이번 그림들이 전하는 인상이랄까. 표정들이 예전의 작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림 상의 주인공이라 부를 만한 인물의 크기가 커지고, 또 중심적인 비중을 갖는 것이 여러 그림들에서 눈에 띄이기도 하지만, '바뀌었다'는 느낌을 두드러지게 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색감' 이야. 화려한 원색들이 많이 사라지고, 채도가 낮게 쓰이고 있는 걸 볼 수있거든? 색깔에 대해서 얘길 해 보지.
 
이광호 : 근데…사실은 이유가 있어서 채도가 낮아진 게 아니고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웃음) 좀..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거 같애. 〈잠〉(1998)같은 그림에선 야릇한 느낌을 주려고, 파스텔 톤으로하기도 하고. 요.. 〈거기 너머〉(1998)같은 경우는 톤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했다. 네가 말하는 채도, 그리고 명도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들어갔어. 그러면서 ‘톤이 중요한데 말이야’ 이런 생각을 혼자 했어. 그림이 되려면 톤을 만들어야 되는데…그래서 이게 지금 왼쪽이 대각선 방향으로 어두워지잖아. 오른쪽은 벌써 어둡고 그랬는데 성공한 거 같진 않아. 저 나무, 저 돌이랑, 분홍색 저런 게 깨고 있거든? 하여튼 이쪽이 이렇게 사선으로 된 거는 내가 톤을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뭘 한 거야. 아직 그게 완성돼 보이진 않아.
 
재연 : 〈잠〉같은 그림에선 상당히 색깔이 가라앉았어. 탈색된 것처럼…무채색이 주로 쓰이고.
 
광호 : 음…저게 지금 오른쪽 상단에 검은 테 안을, 원래는 까맣게 했다가 답답해가지고 지웠거든. 좀 더 어둡게 들어갈 거야. 공간감을, 좀 문처럼 만들어서.. 근데, 아직 구성을 어떻게 해야 될지모르겠어. 그런데 저기가 구성을 통해서 저…명도 차가 저기선 좀 쎄게 나야 돼. 아! 그리고 지금 생각났는데, 채도가 낮아진 건 아크릴에서 유화로 바꾸면서 자꾸 흰색을 섞다 보니까 그리 된 거 같아. 흰색을 조금씩 섞어서 차이를 주는 게 재미있어. 미묘한 차이들…
 
재연 : 전의 그림들은 〈거기 너머〉의 남자가 서 있는 저 다리처럼, 강한 원색으로 칠한 직선적 요소들이 화면을 구획하거나 분할하는 방법이 자주 쓰였는데, 그런 것들이 다소 약화됐어. 직선적이고 각진 면(面)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잠〉의 상단부위에 포진한 여러 직선적 요소들이 색감으로 보나, 주로 몰려 있는 위치의 편중으로 보나, 화면 전체에 '치명적인' (웃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아. 대부분 별반 시선을 멈추게끔 나타나진 않잖아? 〈침묵의 세계〉(1998)에서도 분명히 저 안에 직선의 가로 세로가 분주하게 오고 가고, 심지어는 캔버스틀 받침목의 대각선도 있는데, 이전 그림들에 비해서 직선이, 그뭐랄까. '성큼 들어앉은 직선의 단면들이 화면을 가르고 나눈다는느낌이 적다고.
 
광호 : 〈침묵의 세계〉는 이제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한 거니까. 그런 튀는 색감을 쓸 수가 없었지. 저거는 색깔도 보이는대로 하려고 한거야. 저 실제 캔버스 표면의 하얀 색깔, 캔버스 뒷면의 색깔, 벽의색깔.. 보이는 그대로 그린 거거든. 그리고…'완성도'의 문제인데, 지금도 예전의 그림들을 보면은 굉장히 덜 그렸다는 생각이 들거든.그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지만, 지금 보면 그런 직선, 색띠, 색띠같은 직선 있지? 그런 것이 딱 맞아떨어지게 들어간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나의 부족한 점을 땜질하려는 그런 걸로 보이기도 해. 그래서 완성도를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그런 요소를 좀 배제한 거 같아.
 
재연 : 완성도!
 
광호 : 어. 좀 밀도있는 그림을 그리려고…그러니까… 구성의 문제야. 화면구성의 문제. 그거는 나만 아는 거지. 옛날 그림을 보면, 이쪽이 심심하니까… 분명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도 그냥 막 대기 모양으로 탁, 이렇게 때운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재연 : 〈혜련氏〉(1998)의 저 인물을 화면의 중심으로 놓고 볼 때는 아마도 양(羊)들에 해당되겠는데, 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은 라마도있고 개도 있고, 조각상들도 있고, 옷걸이에 옷에 무슨 유모차에 드리워지거나 펄럭이는 천에…그런 식으로 네가 의미를 내포시키거나 상징성을 부여했을 법한,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형상들이 꽤 등장을 했어. 그것들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꽤 컸다구. 게다가 놓여지는 위치도 화면을 장악하거나, 소위 그림의 '혈(穴)'에 해당하는장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선을 쉽게 끌 만한 곳곳에 자리잡곤 했지.그런데 〈침묵의 세계〉의 우산이나 의자나 선풍기 등에서 특히 그런 느낌이 드는 게, 구성적인 필요 이외에, 예전처럼 '사전적인 뜻 말고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겠구나' 하는 주의를 요할 만큼, 부가된 형상들이 긴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진 않거든? 그런 부차적인대상들이 가지 수와 크기, 위치의 주목성 등등에서 변화된 양상을띄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광호 : 옛날의 내 그림 속에 들어간 인물들은 〈두 손〉이나 〈침묵의 세계〉의 여자처럼 시선이 정면을 응시하지는 않잖아. 응? 그러니까주연이 아니거든. 그전 인물들은 내가 의미 부여만 한 거야. 주연인것처럼 의미 부여했지만, 사실은 그림 안에서는 조연이거든. 주연이없으니까 상대적으로 엑스트라들이 많이 등장을 해야 되잖아. 그런데 지금, 이번에 그린 그림들은 모델의 시선이 일단 정면을 향하고어떤 그림은 모델 얼굴이 굉장히 크고 그러니까 주연이거든. 주인공이야. 주인공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부차적인 요소가 좀 작아지겠지.
 
재연 : 〈잠〉 그림의 위쪽에 쓰인 저 방법 말인데…대상을 향한 위치를 조금씩 달리해서 찍은 사진들을 가지고 부분부분 일치하는 상을겹치고 덧대는 식으로 대상이며, 대상이 자리하고 있는 반경을 조합적으로 넓혀가는 방식을 화면에 즐겨 옮기는 것 같은데...
 
광호 : 어…그게 화면 구성 때문에 그런 거거든. 맨 아래 점들을찍어서 그린 부분이랑 곡선적으로 표현한 중간부분에 대비되게 뭔가직선적인 구성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어.. 근데, 그런 방법을 자주 쓰는 건 나의 말버릇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나의 그…언어의 그 습관이랑, 어? 나는 말을 말을 조리있게 못하잖아. 단어와단어를, 내가 말을 하는 방식이 단어, 단어를 말하는데 중간에 연결을못해 연결이 된다는 감(感)은 있어. 그 중간에 어떤 말을 해야 되는데, 그걸 잘 못 집어 넣는 거지. 근데 그런 확신은 있어. 분명히 연결이 된다는 그런…믿음이 있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뚝뚝 병치하는 그런…기법을 많이 쓰는 거 같아. 사실, 내 언어 습관은 나한텐 콤플렉스야. 그래서.. 그림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화면에 등장하는모든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걸 무척 바래. 그림에서 만큼은정확한 언어 구사를 하고 싶은 거지. 문법에 딱 맞는 언어 구사말이야.
 
재연 : 〈두 손〉이나 〈침묵의 세계〉에서 여성을 그려 놓은 느낌과 동일한 여성이지만, 〈혜련氏〉에 표현된 모델이 주는 느낌이 다소 차이가 있어. 사진을 보고 그린 것과 직접 보고 그린 것 사이의 차이가 아닐까 싶은데?
 
광호 : 〈두 손〉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모델을 직접 보고 그렸고,〈침묵의 세계〉같은 경우엔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그렸다가, 혜련씨가모델이 너무 힘들어 하드라고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가지고그렸는데, 아무리 고쳐도 안 닮는 거야. 거 희안하더라고. 디지털 카메라의 렌즈가 작아서, 상이 좀 왜곡이 되거든. 그 사진을 크게 옮기려고 하다 보니까 '인상' 이 안 잡혀. 그래서 다 지우고 모델을 다시 앉혔지. 그리고 다시 그렸는데, 모델 얼굴이 자꾸 거울에 비친 느낌이 드는 거 있지. 아마 〈침묵의 세계〉에 여러 거울 장치가 등장하게 된데는 실제로 보고 그렸다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거야.나머지 그림들의 모델은 아예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명암이 들어가더라도 나도 모르게 평면적으로 그리게 돼. 게다가 사진이 똑같이 그리는데 더 효과적인데도 인상은 잘 안 잡히지. 사진을 이용해서 그리는 건 인물의 표면을 그리는 거고…실물을 보고 그리면, 살아있는 인상을 그리는 거란 생각이 들어.
 
2. 시선과 응시. 시선의 성격
재연 : 〈두 손〉과 〈침묵의 세계〉를 보면, 〈잠〉도 물론 그렇고 여전히 네가 '시각의 문제' 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작년의 두 그림들 〈동물원〉(1996)과 〈'동물원' 과 나〉(1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했던 '시선' 얘기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 셈이지. 다만, 그 두 그림들을 그림의 앞뒷면으로 가정하는 이채로운 방식을 이용해서, 〈동물원〉그림을 바라보는 나를 설정하고, 그런 나를 보고 있는 또다른 나의 뒷모습을 〈'동물원' 과 나〉(1997)에 그려놓는 식으로 두 시선이 존재하는 상황을 두 개의 그림으로 표현했었던 데 반해 이번 그림들은 특히나 〈침묵의 세계〉에서는 공존하는 그 두 시선을 하나의 화면안에서 보여 주려는 것 같다. 손거울을 통해 모델을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광호 : 맞아 맞는 얘기야. 〈두 손〉같은 경우에도, 시선의 문제를생각하면서 손을 그리려는 의도를 했었어. 내 손이 보이게 내 손이보인다는 거는 그림 앞에 어떤 사람이 있다는 걸.. 의식을 하게 되잖아. '거리두기'를 위한 장치지.
 
재연 : 그런데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두개의 시선이라는 발상이 다분히 ‘라캉(Jacques Lacan)적’이야.라캉이 얘기하는 '시선'과 '응시' 말야. 너도 알다시피, '보는' 시선이 있고 보고 있는 자신이 '보여짐' 을 의식하게 만드는 또하나의자기 시선이 있다라는 구분은, 라캉이 이미 시각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분석해 놓은 내용이잖아? 네 안에서 분리되고 맞물려 있는양상 그대로 '본다' 는 건, 보는 시선만이 아니라 '보여짐' 이 동시에 중첩되는 것이라는 게 그 사람의 설명이었지. 라캉은 그래서 '보여짐을 의식하는 주체'를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궁극적으로자신이 보고 '만' 있는 것에 대한 의심과 견제를 가능하게 하고, 또.대상에 관해 품었던 생각과 느낌을 되돌아 보게 만드니까. 이 점 역시.. 네가 종종 '거리두기' 라고 말하는 부분과도 무척 흡사해 그림을 대면하고 있는 관객이 그림을 보고 있는 자신을 인식한다면, 그림을보는 행위에 함몰되거나 눈앞의 이미지에 일방적으로 설득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광호 : …동의할 부분이 많다는 걸 인정해. 근데.. 사실, 내가 라캉을 직접 읽어 본 기억은 없는 거 같아. 시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건, 아마…'부끄러움' 과 같은 내 성격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해서로 마주 볼 수 없는 사랑의 경험이랄지. 누구나 경험하는 거겠지만, 우리가 으레 이야기하는 '사랑' 이라는 거. 그건 실재하지 않는 낭만적인 개념일 뿐이야. 환상이라고 그 사랑이 환상에 불과할 때, 대상을 바라보는 건 착각이고 오해고, 항상 어긋날 수밖에 없어.
 
재연 : 이건 뭐. 상처받은 영혼이구만! (웃음)
 
광호 : 상처로 인해서 그린거였지. 실제로 옛날 그림들은…
 
재연 : …네 시선의 '성격' 에 관해 한 번 얘길 해 보자. 작년의 네설명을 따르자면, 〈동물원〉그림을 보고 있는 너의 시선은 화면 하단의 젊은 여성에 머무르다가, 네가 그것을 본다는 게 보여진다는 걸 의식한 듯, 황급히 화면의 다른 곳으로 이동했었어. 그 때의 시선과그런 시선의 움직임은 뭔가를 감추려는 성격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거였지. 그처럼 미처 숨기지 못한, 훔쳐보기 성향의 시선이 화면의중심부위에 모델을 커다랗게 그린 이번의 작업들에선 그다지 나타나지 않아. 끈질기게 너를 괴롭히던 은폐의 시선이, 시선의 은폐가 사라진거야?
 
광호 : 어…방금 전에 사랑얘기도 했지만, 옛날엔 인물의 정면을내가 똑바로 바라본 걸 그린다는 건 엄두를 못냈던 거잖아. 응? 그래서 그림 속의 모델이 관객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그림을 그릴 수없었어. 근데 이제는 마주 본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 부담없이 그냥 그리게 돼. 좀 사(私)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아내가, 전속모델이 생겼으니까. 그런 사정으로 내 시선은 말하자면…몰래 바라보기에서 상대방을 직시하듯이 대면하는 1대 1의 시선으로 변했어. 덕분에 (웃음) 은폐의 시선은 이제 거의 사라진 거고, 시선의 문제에대한 생각도 예전 보단 많이 수그러든 거야. 〈거기 너머〉같은,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들을 보면 그래. 그 다음의 다른 고민들이 생긴 거지.
 
3. 반영과 환영
재연 : 저 〈침묵의 세계〉는 화면의 구조가 좀 복잡해 보인다. 모델이 이젤 위에 올려진 사각거울에 비쳐져 있고, 저 뒤쪽 문에 붙어있는 작년. 《Inter–View》展(1997) 포스터가 역상(逆像)으로 보이는 거로 봐서는…
 
광호 : 다 거울이야. 그림 전체가 거울이야. 음.. 저 안에 보이는 사각거울의 외곽부분이 한 번 비친 거고. 그러니까 포스터의 글자가 거꾸로 보이잖아. 사각거울 안의 여자모델은 사각거울과 손거울을 통해서 두 번 비친 거야. 그렇게 해서 '침묵의 세계 라는 책 제목이 온전하게 제대로 보이고 사각거울 안에 잡힌 손거울 속의 남자 눈은 세 번 비친 거야. 그래서 비너스가 또 거꾸로 보여.
 
재연 : 그러면 저 그림은…혹시, 남자가 손거울을 통해 보는 광경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긴거냐?
 
광호 : 어. 저 상황을 내가 실제로 연출을 해 봤어. 가능하더라고. 가능한데…실제와 차이가 나는 건 내 눈, 저 남자의 눈이거든? 그림상의 남자의 시선방향이라면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은 볼 수가 없거든.세 번 비쳤기 때문에 사실은 그림에서 처럼 곁눈질을 하는 눈동자로 나타나지는 못해. 우리가 봤을 때, 남자는 손거울을 정면으로 들여다봐야 그림에 표현된 광경들을 보는 게 가능하니까. …. 남자의 눈을 곁눈질하는 식으로 그린 이유는, 모델과 남자의 시선 모두가 정면을 향하고 있게 되면, 관객이 보기에 시각적으로 피곤할 거란 느낌이 들어서야. 한편으론 남자가 모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조하고 싶기도 했고. 저 그림은 말하자면, 내 지능의 한계를 넘는 그림이야. (웃음)
 
재연 : (웃음) 왜 그렇게 거울을 여럿 이용하고 복잡한 상황을 연출했어?
 
광호 : 처음부터 복잡하진 않았어. 원래는 〈두 손〉을 크게 옮기는 과정에서 실제로 보고 그리다 보니까 무척 실감나게 표현이 됐는데, 모델의 얼굴이 마치 거울로 비춰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거울 장치를 만들게 됐지.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모든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자기나름의 '회화의 정의' 일 수 있다는 나는 이 그림, 〈침묵의 세계〉를 회화에 대한 일종의 정의로 여기고 '회화는 거울이다, 회화는 무엇을 반영한다, 따라서 그림은 거울이다' 라는 내 생각을 유치하긴 하지만 직설적으로 증명하려면, 화면전체를 거울로 보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손거울이 그려지기 전에 이 그림을 몇명이 봤는데, 사각거울의 나머지 부분까지. 그러니까 화면 전체를 거울로 보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여러개의 거울이 등장하게 된거야. 사실, 화면 구성으로 봐서는 저 손거울이 없는게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주거든? 하지만 관객에게 이해를 시키려면 손거울을 넣어야 되고…고민을 많이 하다가 보이는 것이 거꾸로 뒤집어지고 다시 뒤집어지고, 이런 반복과 순환 자체가 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감하게 넣은 거야.
 
재연 : 네가 정작 그림에 반영하고자 하는 건 뭐야?
 
광호 : …음…모든 그림이 다 무엇인가를 반영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반영해야 한다고 난 생각해. 그림의 출발은 자신의 감정이든지, 실제 경험이든지, 모든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 않아?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삶 안에 우주의 원리나 태고의 원시성, 무슨 근원, 무슨 철학…이런 거창하고 고매한 가치들이 잘 보면 다 있는 거 같애. 내가 본 게 나한테는 가장 절실한 것이고, 그게 내 그림의 진실이야.
 
재연 : 자기를 토대로 삼고, 자신의 체험의 각별함으로부터 그림을 풀어나가는 필연성은, 그 정직함은 소중하게 여길 만한 거겠지…. 그런데 〈침묵의 세계〉는 이래저래 생각거리가 많게 만드는 그림이다. 너는 모델을 포함해서 거울에 여러차례 비치고 되비쳐진 실내풍경을 그림에 옮겨 놓았잖아. 그림 상에 표현된 남자의 곁눈질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손거울 안으로 들어온 그 모든 상들을 넌, 네가 본 그대로 그린 거 아냐? 그 과정들을 감안한다면, 이 〈침묵의 세계〉는 '이미지 그득한 이미지입니다' 라는 유별난 동어반복이 되지않나 싶다. 거울에 비쳐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물은 이미지에 해당되는데, 그걸 다시 그림이라는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으니 말이야.
 
광호 : 맞아. 이 그림은 말할수록 복잡해지는데, 이 그림 전체가 거울이고 그림 전체는 손거울 속의 남자의 눈으로 본 풍경이라는 얘기는 앞에서 했잖아. 근데, 여기까지는 그냥 보면 하나의 그림이야. 하지만 캔버스 화면 밖을 생각해 보면, 상황은 더 복잡해져. 화면의 네 모서리 외곽부분들을 확장해서 상상해 보면,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들은 동그란 손거울 안의 일부일 뿐이야. 다시말해서…캔버스 화면을 손거울의 둥근 테두리가 감싸고 있다는 걸 유추해낼 수 있단말이지. 이런 짐작을 하는 순간에 이 캔버스로 옮겨 그린 그림은 네 말대로 이미지가 거듭 겹친 거고.
 
재연 : 결국, 거울에 투영된 상이고 마는 이미지 자체가 되는 거겠군.
 
광호 : 그렇지. 영락없는 환영이 되어 버리는 거지. 이미지의 미로에 갇히는 거야. 어쩌면, 이건 나한테는 함정일 지도 몰라. 〈침묵의 세계〉를 그리면서 내 딴에는 그림이 삶의 반영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려 나갔는데, 결국은 반영물도, 그런 신념까지도 허상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지. 실재의 반영이 환영으로 바뀐 거니까. 딜레마야. 결국은 제자리인 거야.
 
재연 : 그렇게까지 환영으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어?
 
광호 : …현재로서는.. 뭐라고 딱, 짚어서 얘기를 못하겠어. 잘은 모르겠지만…또. 사랑타령을 해서 미안한데.(웃음) 내가 환영을 강조하는 이유는 넋을 빼앗기는 사랑을 비켜가야 한다는 생각과 닮은 거 같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를 구별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보고 있는 걸 의심할 수 있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넋을 빼앗기는 사랑은 비켜갈 수 있다는 생각이랑 비슷한거야. 눈 앞의 그림이 환영이란 걸 발견한 사람들이 그림에 머무르던 시선을 거둬서,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이 환영으로서의 그림에 관한 작업을 자꾸 부추기는 거 같아.


‘98년 6월 초(初)에
이광호의 작업실과, 그리고 황재연의 작업실에서.